롱뷰(Longview)의 한국인에게 배우다

입력 2007-11-18 20:52 수정 2007-11-18 20:52
롱뷰(Longview)의 한국인


 

      미국 텍사스 댈라스에서 동쪽으로 약 250Km쯤 떨어진 곳에 롱뷰(Longview)라는 인구 7만5천명 정도의 소도시가 있다. 도시의 역사와 관광자원을 소개하는 팜플렛을 보면 텍사스 석유산업의 중심지라고 하지만, 유정(油井)이 근처에 몇 개 있는 정도이다. 텍사스유(油)의 씨를 뿌린 것이 바로 롱뷰 근처 유정들이라고 이 곳 주민들은 얘기하는데, 기름값 기준 중의 하나로 언론에 자주 나오는 텍사스유는 이 곳 동부 텍사스가 아니라 서부 텍사스유를 말한다. 현재 지나면서 보면 그리 특별한 인상을 심어 주지는 못하고 전형적인 미국 남부 지방의 풍경을 보여 주는 곳이다. 그래도 텍사스가 남북한 합한 것의 세 배정도로 워낙 넓고, 인구가 주 전체를 통하여 엷게 분포가 되어 있어서인지 텍사스 동부에서는 제법 눈에 띄며 도시의 기능을 발하고 있어, 텍사스 동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처리하며 롱뷰에서 하룻밤을 묶게 되었다.

  

      롱뷰에서 묶는다는 말을 하자, 한 친구가 자신과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댈라스에서 핸드폰 관련 일을 하는 신디 장(Cindy Chang)이라는 한국 교포 친구가 있는데, 그녀의 부모가 롱뷰에서 일본식당을 한다며 농담반진담반으로 한 번 찾아가 보라는 얘기를 했다. 식당의 이름도 모르고, 신디장과 그렇게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 물어 보기는 좀 어색하다고 했다. 롱뷰 정도의 소도시에서 일본식당이 몇 개나 되겠는가, 맘만 먹으면 바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심 시간이 약간 지날 무렵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을 하면서 그 곳에 있는 일본식당이 몇 개나 되냐고 물었더니, 지나치다 싶게 친절한 종업원이 자신의 경험에 의거한 평가까지 곁들이며 바로 두 개 식당을 추천해 주었다. 주인이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는 모르겠다고 해서,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며 전화번호를 받았다.

  

      짐만 대충 풀고 바로 프론트데스크에서 얘기해 준 두 개 일본식당 중 더 오래 되었고 크다는 곳으로 전화를 했다. 점심시간이어서 한창 바빠서 그런지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른 식당도 전화를 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혹시나 다른 곳이 없을까 하여 전화번호부를 찾아보았더니 식당 섹션만 대여섯 페이지였다. 소도시라고 너무 얕보았던 것 같았다. 첫째 페이지에 내가 처음 전화를 걸었던 식당의 광고가 실려 있는데 오후 5시부터 영업을 시작한단다. 전화를 받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힐끗힐끗 잔글씨의 리스트를 살피며 페이지를 넘기는데 일식집 한 곳의 광고가 또 눈에 띄었다.  

  

      '마쯔(Matsu)'라는 곳이었는데, 물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전화를 했다. 이번에는 어느 아주머니가 전화를 받았는데, 'Matsu, Japanese restaurant'하는 수화기를 통하여 들려오는 세 마디의 단어를 듣는 순간 한국인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한 호흡을 쉬고, 바로 '여보세요'하며 한국말을 하자 아주머니께서  깜짝 놀라 한 호흡을 쉬고 '네, 여보세요' 약간 떨리는 한국어로 받았다. 다짜고짜 그러나 나름대로 예의 바른 말투로 혹시 사장님의 성씨가 장씨, 장선생님이 맞는지 여쭈었다. "아닌데요, 우리 애기 아빠는 한씨인데"하면서 묘한 얘기를 덧붙였다. "근데 미국 오면서 어머니 성씨를 따라서 한씨가 된 거고, 원래는 장씨에요."  


 

        원래 재미교포로부터 시작하여, '화교'나 '닛세이(Nisei)'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일본인들까지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과 그들의 자세한 삶의 모습과 배경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이렇게 묘한 여운을 남기는 아주머니의 말씀을 듣자 음식점을 찾는다는 이상으로 갑자기 더 흥미가 일었다. 그 때부터 본격적인 탐문 혹은 대화가 이어졌다.

  

"혹시 신디 장이라고 댈라스에서 일하는 따님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딸이 셋 있는데, 제일 큰 애가 고등학생인데요. 근데 신디라는 조카는 있는데, 걔는 신디 킴이에요." - 신디 킴은 농담으로 하신 건지는 몰라도 엉뚱하게 재미있었다. 서로 긴장이 풀어지면서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한국분이 하시는 다른 일식집은 혹시 롱뷰에 있나요?"

"쇼군이라고 있는데, 거기 사장님은 박씨인데요." 퍼뜩 신디 장이라는 인물의 나이는 알지 못하지만, 결혼을 해서 성씨가 바뀌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에는 딸이 있나요?"

"(당연하다는 듯이)네, 있죠. 딸이 하나 밖에 없는데, 걔도 고등학생이에요."

  

      이 때서야 자초지종을 아주머니께 설명을 드렸다. 바로 점심을 하러 가도 되는지 묻자, 오후 5시부터 영업을 시작한단다. 시골이라 모든 일식집들이 그렇단다. 자신은 식당 전화를 핸드폰과 연결시켜 놓아서,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소도시라 점심 손님이 없고 관습적으로 저녁만 영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손님에게 응대할 수 있는 전화는, 연결 통로는 열어 놓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관공서나 다른 비지니스 관련자들이 연락할 일도 있을 터인데, 영업시간이 아니라고 전화를 닫아 놓고 있는 다른 음식점들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성심껏 응대를 해주시고, 의심을 가질만한 탐문수사에도 적극 협조해 주시는 아주머니와 그 식당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저녁에 들를 지도 모르겠다, 들르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상투적인 말로 일단 통화를 끝냈다.

  

      롱뷰에서 30분쯤 떨어진 곳에서 저녁 8시 좀 넘어서까지 일을 보게 되었다. 함께 간 두 명의 친구들에게 낮에 있었던 마쓰라는 음식점 여주인과 통화했던 일을 얘기해 주고, 신디 장 아버지의 음식점이 아니더라도  저녁을 그 곳으로 가자고 했다. 롱뷰와 같은 곳까지 흘러 들어와 사는 고생하는 교포들을 위문하는 것도 우리의 할 일이라는 거창한 목적까지 내밀었다. 마쓰로 전화를 하니, 9시에 원래 문을 닫는데, 어차피 정리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해서 10시반까지는 있어도 괜찮다며 오라고 했다. 주소를 묻자, 아주머니께서 한국식으로 설명을 하시는데, "고속도로 엑싯(Exit) 빠져 나와서 좀 달리면 '마쓰'라고 큰 간판이 보이고요, 거 뭐라 하나 '언덕 위의 집' 같은 분위기 내는 곳 있어요." 재차 주소를 물어서 받았는데, 도시 내 북쪽에 위치한 호텔과는 정반대의 남쪽이지만, 순환도로 내부에 있어 10분 남짓이면 갈 것 같았다.  

  

      차에 장착된 내비게이션(Navigation)에 식당의 주소를 쳤는데 롱뷰 시계(市界)를 벗어난 곳으로 나왔다. 그 식당이 속한 행정구역상의 도시 이름을 알 수가 없어서 대충 어림짐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알량하나마 불빛이 훤한 중심가 다운타운을 넘어서 드문드문 도로변에 집들이 박혀 있다 그것마저 사라져 드문드문 목장이나 농기구 수리소 같은 곳의 간판만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길로 접어들어서도 한참을 갔다. 몇 번 마쓰로 전화를 하여 원래 장씨에서 한씨로 바뀌었다는 사장님과도 통화를 하여 경로안내를 받았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다른 친구들이 도저히 음식점이 있을 분위기가 아니다, 지금이라도 차를 돌리자고 하여 차를 돌리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마쓰'라는 네온사인 간판이 나타났고, '언덕 위의 집'이라는 말대로 정말 낮은 언덕 위에 아껴서 뜸뜸이 크리스마스 조명을 집에 두른 식당 건물이 있었다.

  

      집 바로 옆 숲 속 공사장 터 같은 주차장으로 차를 모는데, 살짝 벌려진 창문의 커튼 틈새로 우리 일행을 쳐다보는 한국인 부부의 모습이 힐끗 보였다. 버려진 것과 같은 차들이 몇 대 널려져 있는 주차장 분위기에 한 친구는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귀곡산장'과 같은 음식점에 굳이 가지 말고 다른 곳으로 그냥 가자고 했다. 그러나 그 부부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커튼 틈새로 빠져 나온 부부의 눈길과 눈을 맞춘 상태였다. 일단 들어가서 아닌 것 같으면 맥주 한 잔만 마시고 바로 나오자며 겨우겨우 달래서 들어가는데, 화룡점정(畵龍點睛)이랄까, 현관 위 차양이 불에 타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일식집이기는 하지만 철판구이를 주로 하는 집이었다. 계산대 있는 곳에서는 손님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는데, 안쪽으로 들어서니 20명 남짓한 백인 남녀노소가 생일잔치를 하고 있었다. 계속 미심쩍어 하는 눈치의 친구들 때문에 간단한 샐러드나 구이 하나만 놓고 맥주나 한 잔하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동부 텍사스 철판구이 경연대회에서 최고상까지 탔다며 철판구이를 강권하는 아주머니를 이기지 못하여 결국 철판구이까지 시키고 말았다. 다른 안주는 아주머니께서 아저씨 솜씨가 아주 좋다면서 있는 것 가지고 대충 해 줄 터이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웨이트리스를 하나 데리고 와 자신의 딸이라며 인사를 시킨다. '안녕하세요' 한 마디도 힘들게 한국어가 서툰, 그러나 표정만은 아주 밝은 딸이 홍조 띈 통통한 볼에 미소 가득 담아 인사를 하고 갔다.

  

      간단한 야채와 장국이 나오고 맥주 한 잔을 마시는 사이에 젊은 요리사가 와서 어색한 일본식 영어로 인사를 하고 약간의 쇼를 보여 주더니 불쑥 한국어로 물었다. "고기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그리고는 본격적인 퍼포먼스형의 전형적인 철판요리를 적절히 음향효과와 묘기를 섞어 가며 현란하게 펼치는 사이에, 주인아저씨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낙지볶음과 두부김치 요리를 가지고 절룩거리며 걸어 와 합석을 했다. 식당에는 한국 요리를 위한 재료가 별로 없어서 요리가 맛있을지 모르겠다는 변명을 미리 하셨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한 젓가락씩 과분하게 든 우리의 찬사를 들으며 환한 미소를 짓는 아저씨의 얼굴 한 가운데 이마에서부터 시작하여 콧등까지 칼자국 같은 상처가 길게 그어져 있었다.  

  

      점심 때 엉겁결에 통화를 하게 된 얘기로 시작하여 한바탕 웃음들을 뿌린 후 자연스럽게 아저씨의 인생역정으로 이야기가 넘어 갔다. 상당한 고위 장교지만, 집과 가족에는 무신경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자랐단다.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를 따라 함께 중학 시절 미국 조지아(Georgia)주의 애틀란타(Atlanta)로 왔다고 한다. 그 때 아버지의 성인 '장'을 버리고 어머니의 '한'씨를 성(姓)으로 갖게 되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고생을 했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아주 잘해서, 조지아대학(University of Georgia)를 우리로 치면 수석으로 입학하여 신문에까지 나오고 했단다. 이 대목에서 아주머니께서 집에 그 신문기사 스크랩한 것도 있다며 거들었다.


 

        물에 뜨는 오리 인형 캐릭터로 유명한 조지아에 본부를 둔 가장 큰 보험회사인 애플랙(AFLAC)에서 4년 장학금을 제공하고 매년 인턴 기회를 주었다. 대학 2학년 때 두 번째 애플랙에서의 인턴을 마치고 학기가 시작하기 까지 시간이 남아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다가 어느 일식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단다. 식당 종업원의 위계체계가 확실한 미국에서 가장 아래인 주문을 받지 않고 물만 가져다주는 ‘버스보이(Bus boy)'로 일을 하게 되었다.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그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저씨 말에 의하면 80년대 초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서 영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어서 주인이 영어를 잘하는 아저씨에게 매니저 자리를 제안했고, 심각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제의를 받아 들여 학교를 떠났다. 이후 한번도 뒤돌아 보지 않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후회를 해 본 적이 없다.  


 

        매니저로 일하게 된 일식집은 번창하여 남부 지역에서는 조지아 애틀란타를 넘어서 조지아주의 동쪽 끝인 사바나(Savannah)와 주경계를 넘어 플로리다(Florida)의 탤라하시(Tallahassee)라는 곳에까지 음식점을 열었단다. 중간중간 아저씨는 일식 요리도 직접 익혔는데, 맨 처음 배운 것이 철판요리란다. 쇼맨쉽과 창의성이 깃들여야 하는 철판요리를 어찌나 잘했든지 여성 손님들의 키스 공세와 구애가 끊이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를 묻자, 자신감과 겸손함이 함께 묻어나는 말투로 배운 것이나 보통 하는 것보다 한발만 더 나가려 노력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밥공기를 뒤집개 위에 얹고 던져 올려 요리사 모자로 받는 묘기가 있는데, 좀 더 재미있게 할 방법이 없을까 하여 밥공기 윗부분을 뒤집개로 강하게 쳐서 회전을 하며 날아가서 모자로 받으니 손님들이 더욱 열광을 했다는 것과 같이 부단히 조금 다르게, 더 재미있게 하려는 시도를 했다고 한다.  


 

        이 때 아주머니가 다시 끼어 들며 말씀을 하셨다. 함께 일하는 종업원들이 ‘네 신랑 또 여자 손님이랑 껴안고 있다’고 이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자신은 워낙 열심히 하고 잘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추호도 그것에 대해 의심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단다. 바로 철판구이 음식점에서 직접 요리사로 일하면서 유학을 와서 그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아주머니를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아저씨의 다리 다친 사연과 아주머니께 대한 감사의 말씀이 약간은 숙연하게 이어졌다.  


 

        “제가 고등학교 때 오토바이를 타다가 크게 사고를 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도 다리를 절룩이며 걸어요. 젊었을 때는 그 콤플렉스가 말도 못했죠. 그런데 아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마누라가 그런 나를 선택해 주고 지금까지 이렇게 같이 사는 것만 해도 항상 고맙기만 하죠.” 토크쇼 사회자와 같은 분위기로 아주머니께 선택(?)의 이유를 여쭈었다. “저는 능력을 우선으로 보았어요. 사회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그런 것보다는 나를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죠. 그런데 보니까 항상 낙관적, 낙천적이고 손님들에게 인정을 받고, 어렸을 때 가정에서 상처를 받아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어머니께 잘하고, 나를 편하게 해줄 수 있겠다 결론을 내렸죠.”


 

        말이 리듬을 타기 시작한 아저씨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다시 이어 갔다. “그런데 왜 이런 시골에 들어와 살게 되었느냐?” 요리사로도 가끔 일을 하면서 조지아와 플로리다에 흩어져 있는 몇 개의 일식집들을 관리하며, 새로운 식당 여는 것도 함께 맡다 보니까 몸이 너무나 바빴단다. 새벽에 식당 문을 닫고, 제대로 눈도 붙이지 못하고 비즈니스 관계로 골프를 나가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일어났다. 돈은 많이 벌었지만 고단한 나날을 보내다가 갑자기 자신이 그렇게 싫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하는데 마침 현재 롱뷰의 우리가 들른 곳에 자리가 났다고 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20번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킬고어(Kilgore)라는 도시에 속해 있는데, 거의 중간의 황량한 지대에 있다고 보면 된다.  


 

        제대로 자리를 잡기까지 1년이 걸렸다. 아저씨는 재료의 선택이나 다루는 방식과 기술, 그에 따른 우러나는 맛에서 다른 식당보다 앞선다고 했다. 내가 먼저 접촉을 했던 롱뷰의 라이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른 식당의 사람들이 자주 와서 먹는 정도란다. 그러면 손님들이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와서 그 사실을 이르곤 한단다. 적들이 들어와 있다고. 당연히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신경을 쓰지 않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그만큼 지역 손님들과의 유대가 아주 강한 것 같았다. 사실 그 면에서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사는 마을, 곧 주택 단지 같은 것이 열여섯 가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새로운 주민을 받아들이는데 주민투표를 하고 아주 까다로운 편인데 ‘마쓰’ 일식집의 부부라니까 다들 두 손 들고 환영을 했다고 자랑했다. 한국식 바비큐 파티도 자주 열고, 특히 애들 학교에서는 아주머니가 ‘마쓰 마마’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최고의 인기라고 한다.


 

        우리가 들르기 며칠 전에 현관 입구에 불이 났는데, 신고를 주민들이 해준 것은 그렇다 쳐도 다음날까지 안부를 묻는 전화와 내방객이 끊이지 않아 제대로 장사를 하지 못했단다. 한국에 돌아와 몇몇 사이트를 통해서 식당에 대한 평가를 보니, 맛에 대해서는 약간 엇갈리는데, 주인 부부를 대표로하는 종업원들의 친절도와 시설 청결도는 최고 점수를 받고 있었다. 종업원들의 경우 철판요리를 하는 친구들은 주로 한국 유학생들을 쓴다고 한다.  세월이 제법 흐르다보니 한국에 마쓰 출신들의 모임이 있다고 한다. 음식점을 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면서 작년 아저씨가 미국에 온 이래 처음으로 귀국했을 때 재회의 자리를 성대하게 마련하여 아저씨를 감동시켰단다.  


 

        그렇지만 요즘의 아르바이트건 본업이건 요리사들을 평가해달라고 하자 “자신들이 배운 것만 소화시키려 한다”고 강하게 비판을 하셨다. 창의적으로 한 걸음 더 나가고자 하는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맞다! 틀을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영어식으로 하면 프레임(Frame)을 깨고, 상자(Box) 밖으로 나와야 한다.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가르침을 정리할 차례가 된 것이다.


 

        아저씨의 두 번째 가르침은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에게 맞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4년 장학금이나 안정된 직장 자리도 과감하게 뿌리칠 수 있어야 한다. 눈앞에 이득을 볼 길이 있더라도 그것이 진정 자신의 제품과 기업이 내세우는 것과 맞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과 확연히 구분될 수 있는 무기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저씨에게는 아시아인으로서의 영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 영어라는 것이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늘게 된 것이 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열심히 하다 보면 자신의 무기는 생기기 마련이다.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기준으로 남편감을 고른 아주머니께도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박강성과 이승철을 좋아한다는 아주머니. 지난 주 LA에 이승철 공연을 보러 가셨을텐데 모처럼 언니와의 재회도 즐기고 맘껏 소리 지르고 오셨으면 좋겠다.  


 

        12시 반경 되어서 자신의 집으로 가서 계속 자리를 이어 가자는 아저씨의 제의를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친구의 핑계를 대고 겨우겨우 사양했다. 우리도 무척이나 아쉬웠다. 마음 뿌듯한 한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저녁이었다. 다시 한번 댈라스에 들르게 되면 댁까지 방문하여 맘껏 놀겠노라 약속하고 나왔다. 으슥했던 길이 훤해졌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짧기만 했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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