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난(金日成의 亂)

 

      『민족의 증언』이란 제목으로 모신문사에서 1970년에 연재하였던 기획물을 6권 짜리 책으로 펴낸 것을 고등학교 2학년 때 탐독을 했었다. 수 많은 국내외의 자료들도 충실하게 참고하였지만, 제목 그대로 실제 목격자나 관여자들의 육성 증언이 뼈대를 이룬 구성이어서, 다큐멘터리 인간 드라마를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1970년이니 어떤 위치에서건 6·25를 제대로 겪은 사람들이 대부분 생존해 있었고, 한국의 지도층 인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거의 망라하다시피 출연을 하는데, 1950년초의 그들의 모습에서 출발하여 20년이 지난 후, 그리고 그 후 세상을 뜨기까지 어떤 인생 역정을 지냈던가를 혼자서 엮어 보는 재미도 부가적으로 있었다. 당시 아는 분 댁에서 빌려서 읽었는데, 그 분 댁에서 책을 돌려 달라는 얘기가 나올 때까지 몇 차례를 거기에 나온 대부분의 주요 에피소드들을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었다. 이야기꾼처럼 몇몇 친구들에게는 거의 매일 그 책에서 읽은 것들을 풀어 놓았고, 한동안은 전쟁터에서 헤매고 있는 꿈을 집중적으로 꾸기도 했다.

 

      판형을 달리하여 1983년에 이 책의 개정판이 8권으로 나와서 바로 구입을 했다. 이전 6권 짜리는 절판이 되어서 몇몇 헌책방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하며 전집류들은 주로 본가에 놓아두고 있었는데, 한 달여전 본가에 들렀다가 고교시절을 회상하면서 이 책을 뒤적거리는 것을 눈 여겨 보신 아버지께서 나름대로 6·25를 기념하신 것인지 이 전집을 우리 집으로 가져다 놓으셨다. 예전에 인상 깊었던 몇몇 부분을 들추어 보는데, 전쟁 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내용보다는, 그 내용들 바로 증언들의 이면에서 1970년대 한국인들을 읽어 내는 것이 재미있었다. 북한을 비롯한 공산진영은 절대악(絶對惡)이고, 이에 대조되어 미국은 절대선이었다. 공산진영의 모든 언행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음모론적인 시각에서 해석이 되고, 어떤 부분에서 공산측의 제의를 따라가는 미국의 행동은 공산주의의 실체를 모르는 순진함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하는 식이었다. 1950년대초를 배경으로 한 회고담에서 1970년대의 반공교육을 중심으로 한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허탈한 웃음 뜸뜸이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이런 시각에서 우러난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기도 하다.

 

      이번 주말에 또 이 책의 몇몇 군데를 뒤적이며 주의해서 본 것은 6·25를 어떻게 불렀던가 하는 부분이었다. 사실 이제 발발로 치면 거의 60년 가까이 되는데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이 땅에서 벌어졌던 그 비극적인 사건을, 그리고 세계의 정치적 지형에까지 영향을 미친 그 사건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올 6월 25일에는 이 주제가 제법 심각한 논의 대상으로 취급이 되었다.

 

이 전쟁을 체험한 세대들은 “6·25” 혹은 “6·25사변”이라 부르고, 대체로 50대들인 전후 1세대들은 “6·25동란” 혹은 “한국동란”으로 부른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한국전쟁”, 일본에서는 “조선전쟁”,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고 지칭하는데, 우리 30~40대들은 미국식으로 “한국전쟁”이라 부른다. 반면, 20대들은 이 전쟁이 무슨 전쟁인지도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제주일보 2007. 6.26)

 

      세대별로 다르게 부를 수도 있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자신의 경험과 사상에 따라서 또한 다르게 부를 수 있다. 반공을 절대선으로 부르짖던 쪽에서는 구국의 선봉대였고, 그 외의 사람들 다수에게는 무자비한 공포의 화신으로 분단이 되면서 주로 평안도에서 월남한 청년들로 이루어진 서북청년단이란 단체가 있었다. 그 서북청년단의 단원이었던 '왕년'의 경력을 입버릇처럼, 청년단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던 중고등학생들에게 주입시키시던 한 선생님께서 6·25는 '김일성의 난'으로 불러야 한다고 힘 주어 말씀하실 때면 우리는 그 매서운 눈빛의 사정권에서 벗어나기에 급급했다.

 

      한겨레신문 한승동 기자의 말처럼 호칭이 제각기 다른 것은 '아직 전쟁이 종결되지 않아 객관적 평가가 어렵고 참전세력들이 각기 자신에게 유리한 이름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런 용어를 쓰는 사람들도 상대방이 받아들일 정도로 객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적인 명분 쌓기나 내부 결속 목적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만들어 낸 용어일 따름이다. 중국에서 미국에 대항하여 (북)조선을 도와 싸운 전쟁이라고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고 하고, 북한에서 '조선해방전쟁'이라고 하는 것에 무턱대고 개탄하고 윽박지를 일은 아니다. 그렇게 쓰게 된 사정을 이해하는 위에서 그런 용어들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해 주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다.

 

      1954년 휴전 후의 한국통일과 인도차이나 분쟁을 다룬 제네바회의에서 미국의 존 덜레스(John Dulles) 국무장관은 주은래(周恩來) 중국 총리가 악수하려 내미는 손을 거절하는 외교관으로서는 범해서는 되지 않을 무례를 범했다. 한국대표단의 단장격이었던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은 주은래를 비롯한 중국대표단과의 회의에서 중국을 계속 '중공(Communist China)'이라고 부름으로써 주은래에게 "왜 우리는 공식호칭으로써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이라고 부르는데, 당신은 '중공'이란 용어를 고집하는가?'라는 항의를 받으며 회의 자체가 중지되었다고 한다. 주은래가 대표했던 공산 중국을 외교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이 통일의 꿈을 깨뜨린 철천지 원수라고 인식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외교회의를 하러 간 외교관의 자세는 아니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여 '천황(天皇)'이라는 호칭을 썼다고 국내의 주요 언론들이 비판조의 기사를 쓰고, 일부 여론도 들고 일어난 적이 있었다. 방일 후 귀국기자회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그와 관련된 질문에 자신은 외교적으로 국가를 대표하여 만나기 때문에 공식적인 용어를 써야 하는 것이고, 일반 국민들이나 언론은 '일왕(日王)'이나 다른 명칭으로 써도 별 상관없다고 명료하게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일왕'이건 '천황'이건 호칭을 가지고 왈가왈부 흥분하는 행태는 없어진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영문학자인 고려대의 김우창 명예교수는 모신문의 칼럼에서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나오는 유명한 말에 '이름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똑같이 향기롭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로미오와 줄리엣'에 나오지만, 사랑에서나 정치에서나 중요한 것은 이름보다 실질이다"라고 했다. 그렇다. 실질이 중요하다. 똑같은 실질을 가지고 서로 다르게 얘기할 수 있다. 다르게 얘기한다 해도 실질이 그에 따라 바뀌지는 않는다. 그런데 '물위지이연(物謂之而然-사물은 일컫는 대로 그렇게 된다)'는 장자(莊子)의 구절처럼 계속 같은 방식으로 부르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사물을 어떻게 부르는가가 단지 그 사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

 

      아주 가까이 내 제품을, 고객을, 경쟁자를 어떻게 내가 일컫고 있는가를 살펴 보자. 우리만이 아는 암호와 같은 기술용어로만 이루어진 모델명으로 우리 제품을 얘기하면서, 고객은 조사보고서의 %와 같은 한낱 숫자로만 존재하고, 경쟁자는 경멸적인 호칭으로만 불러지지 않는가? 그러면서 우리는 친근한 제품, 고객과의 감성적 연대, 파이를 키운다는 미명하에 업계 공동의 상호협조를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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