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것과 ‘잊혀진’것

입력 2007-03-05 18:30 수정 2007-03-06 09:45
'잃어버린’ 것과 ‘잊혀진’것

 

      '가르치다'와 '가리키다', '얇다'와 '가늘다', '두껍다'와 '굵다', 적다'와 '작다', '잃어버리다'와 '잊어버리다' 등등. 초·중학교 국어 수업 시간에 의미와 용처를 구분하여 확실하게 배우는 단어들이다. '우리 말 제대로 쓰기'와 같은 책이나 기사에서는 거의 첫 머리에 가장 자주 나오는 사례들이다. 그만큼 우리가 자주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이메일이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쓰면서 그런 경향은 더욱 번져 가기만 해서, 아마도 몇 년 후면 통폐합이 일어날 것만 같다. 약 5년전 뉴욕 체류 시절에 메트로폴리탄 박물관(Metropolitan Museum)의 특별전 두 가지를 연속하여 다녀 온 적이 있었는데, 위의 예 중 '잃어버리다'와 '잊어버리다'의 미묘한 차이에 대한 호기심이 유물 자체의 매력과 함께 주요한 동기였다.

 

메트로폴리탄에서의 두 특별전 이야기

 

            먼저 본 것은 "Treasures from a Lost Civilization : Ancient Chinese Art from Sichuan(잃어버린 문명에서 찾은 유물들 : 서천 지방에서 출토된 고대 중국 유물전)"이었다. 관심을 끈 주된 이유는 사천(四川) 예전의 '서천(西川)'이라는 지방이 주는 매력에 있었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열심히 읽은 독자라면 서천이라는 지명이 그렇게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을 통하여 교묘하게 형주(荊州) 땅을 얻어, 겨우 발붙일 자리를 마련한 유비(劉備)가 제갈양(諸葛亮)의 원대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에 따라 익주(益州)의 유장(劉璋)을 치러 가는데, 그 익주 지방이 바로 서천이다. 삼국지연의에서 서천은 물자가 풍부하고, 천혜의 요새이며, 조조(曺操)가 직접 저술했다고 스스로 자랑하던 병서(兵書)인 '맹덕신서(孟德新書)'의 내용을 서천에서는 어린이도 읊조리고 다닐 정도로 출중한 인물도 많은 그런 지방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결국 유비가 성도(成都)를 도읍으로 하여 촉(蜀)을 건국한 곳이 바로 서천이다. 그런데 중국 역사에서 서천 지방이 그나마 화려하게 조명된 시기는 바로 이 때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도 사실 소설화된 삼국지연의에서만 그런 것이고, 정사(正史)에서는 조조의 위(魏)가 중심이다.

 

      1930년대 중일전쟁에서 후퇴를 거듭한 지앙지에쓰(蔣介石) 정권이 남경(南京)에서부터 후퇴를 거듭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이 지방의 중경(重慶)이었다. 당시 전란의 와중, 역사의 주변부라고 할 수 있는 그 피난지에서 중국 현대 학술과 문화의 찬란한 금자탑들이 쌓아졌다. 김용옥 교수의 말을 빌면 그 넓은 중국 땅 각지에 흩어져 있던 재사(才士)들이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이면서 에너지가 융합되어 폭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마자 재사들이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고, 그들이 이루어 냈던 업적들까지도 챙겨서 떠난 후, 서천 지방은 다시 주변부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인구를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도시가 중경이고, 박제화, 규격화된 북경, 남경, 상해, 광주를 잇는 해안 지방의 경승지를 떠나서 최고의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아직도 서천이라고 하면 언뜻 당시 특별전의 제목처럼 '잃어버린(Lost)'와 같은 단어가 어울리는 그런 지방으로 취급되고 있다. 


     서천 지방 유물전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기 위하여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웹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근 20개에 이르는 특별전 중에서 역시 흥미를 끄는 것들이 몇 가지 있어 연달아 가게 되었다. 바로 "The Forgotten Friezes from the Castle of Velez Blanco(잊혀졌던 벨레즈 블랑코 성의 벽 장식)"이란 특별전이었다. 'Frieze'라는 것은 처마와 방벽 혹은 문 사이의 띠처럼 되어 있는 벽, 주로 그 벽의 장식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당시 진열된 장식은 스페인에서 가장 인기있는 신화 속 인물인 헤라클레스의 주요 사건, 그리고 로마 시대 시저의 개선 행진이라는 재미있는 소재를 다루었다는 것이다.

 

      장식 자체도 눈길을 끄는데, 제목에서처럼 왜 그 장식들이 잊혀졌을까 하는 뒷 얘기가 더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사연인즉슨 1905년에 유럽 다른 지방과 미국에서의 전시를 위하여 이들 장식들을 옮기는 와중에 감쪽같이 이들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별다른 결실없이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영구미제사건으로 분류했는데, 근 1백년이 지나서 프랑스 파리의 어느 작은 박물관 창고에서 이들 장식이 발견된 것이다. 그래서 잊혀졌다고 한 것이다. 거기서 그럼 '잊혀진' 것과 '잃어버린'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일었다. 별다른 차이없이 한 쪽에 '잃어버린(Lost)'라는 단어를 써서, 같은 단어를 중복 사용하기가 내키지 않아 '잊혀진(Forgotten)'으로 단순하게 대치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사자의 대상에 대한 지식 정도와 심리적, 물리적인 거리의 차이가 두 단어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추론하였다.

 

내가 모르면 ‘잃어버린’ 것-경계해야 할 서구중심 시각

 

     미국인을 포함한 서구인의 시각에서 벨레즈 블랑코의 벽 장식에 대해서는 이미 16세기 스페인의 대표적인 건축 예술 소품으로서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는데 공교롭게 그 소재지만이 불명확해졌고, 그렇게 세월이 가다 보니 사람들의 뇌리에서도 희미해져서 '잊혀진(Forgotten)'이란 표현을 쓴 것 같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그러나 아주 가끔 생각나는 '잊혀진 옛 애인'과 같은 식이리라. 반면에 서천 지방의 유물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랐던, 즉 '잃어버린(Lost)'된 것들을 찾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에는 서구의 중국에 대한 편견, 오리엔탈리즘의 고고학 판이 깔려져 있다.

 

      지금은 상식처럼 누구나가 인정하는 상대(商代) 은(殷)나라의 존재를 서구 학계에서는 은나라의 대규모 유적지인 은허(殷墟)가 본격적으로 발굴되기까지 철저하게 무시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굳이 그런 발굴을 통한 유물을 챙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기록으로부터 그리고 학문으로서의 연원이 오랜 한자(漢字)의 원형을 찾는 노력을 꾸준히 이어 오면서, 하(夏)나 은의 존재는 의심할 여지도 없는 것이었다. 거북 등 껍질의 갑골문도 사실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것이었고, 물리적으로 갑골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과 형식 등에 대해서는 상당한 학문적 연구 성과가 축적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구식 고고학적 방식에 의하여 은허를 발굴하기까지, 서구의 학자들은 이런 중국 전통의 학문적 성과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시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은허를 발굴하면서 그들은 '잃어버린(Lost)' 상대(商代) 은나라의 문명을 자신들이 발견하였노라고 떠들어댔다. 


     서천은 사실 정치사에서는 주변부이었을 지 모르나, 문화사적으로는 중국의 다른 어느 지역 보다 풍성한 전통을 자랑한다. 지도상에서 보면 서천은 은나라의 뒤를 이은 서주(西周)의 중심지에서 별로 떨어져 있지 않다. 이번 특별전에 출품된 청동기 유물 중 가장 오래 된 것들이 바로 서주 시대의 것들인데, 거리상으로 서주의 청동문물이 이 쪽 지방까지 유입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실제로 뚜렷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이번 특별전의 기획자들은 중국 청동기의 제 1문명인 상대와 제 2의 서주시대를 이어서, '잃어버린' 제 3의 문명을 발견했다고 떠들어댔다.

 

      대부분의 대규모 고고학적 발굴들과 마찬가지로 이 서천의 유물들에도 극적인 면모가 있기는 있다. 1986년 서천 시골 벽돌공장의 직공들이 땅을 파다가 곡괭이에 걸린 청동 조각 파편을 신고함으로써 발굴이 시작되었으니, 너무나도 잘 알려진 진시황릉과 한대 귀족의 무덤인 마왕퇴(馬王堆)에 이어 한동안 뉴스거리가 없었던 중국에서의 간만의 고고학 발굴 뉴스로서 가치를 높이려고 제 3의 청동기 문명 운운하는 소리가 중국 고고학계 일각에서도 초기에 잠깐 나왔던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소리를 특별전의 제목으로까지 떠드는 것은 장사 속을 떠났다면, 서구적인 편견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다. 


     서주 이후에도 서천은 중국과 서역을 이으면서도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여, 동서 양쪽에서부터의 이질적인 문화를 자신들의 토양에 맞추어 소화시키는 독특한 유산을 자랑했다. 진(秦)이 망하고 일시적으로 천하를 쟁패한 항우(項羽)가 유방(劉邦)에게 영지로 준 땅이 서천의 한중 땅이다. 부하들의 불평이 대단했지만, 유방은 아무런 불평없이 한중을 향하여 떠나고, 배반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중과 관중을 잇는 잔도(棧道)를 잘라 버린다. 즉, 자신은 부하들 데리고 한중 서천 땅에 틀어박혀서 살겠다는 표시였다. 항우를 안심시키고 부하들의 투지를 불태우기 위한 계책이었지만, 그만큼 천혜의 요새로 외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중원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속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불교도 서천 지방을 거쳐서 들어오는데, 불교 유입 이전에도 특별전이 다룬 서주시대 말기인 기원전 12세기부터 삼국지연의에서 다루는 시대 직전인 기원후 2세기초인 천년간에 걸쳐서 서천은 곡창지대로서 나름대로의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문화 자체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는데, 거기에 대고 '잃어버린' 운운한 꼴이 된 셈이다. 우리 나라의 것을 들어 예를 들면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적들을 전시하면서 "잃어버린 백제 문명의 유물들"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의 브랜드는 잃어버린 것인가, 잊혀진 것인가?

 

      단어의 원래 뜻으로 보면 '잃어버린(Lost)'는 분실물센터를 지칭하는 'Lost & Found'처럼 물리적으로 없어진 것을 뜻하는 반면, '잊어버린(Forgotten)'은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진 것을 뜻한다. 아무리 옆에 물리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도,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경우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잊혀진 것이다. 우리가 소위 '재활성화(Revitalize)'한다고 하는 브랜드는 잊혀진 기억을 새롭게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리적인 혜택이나 품목 자체의 물리적 대표성만을 얘기하는 브랜드는 더 나은 물리적 속성이나 새로운 품목이 생성될 경우 소비자들이 아예 잃어버린다. 혁신적인 신기술을 개발했다고 그것을 그대로 상표명에 갖다 붙인 것은, 보다 새로운 기술이 나오는 순간 브랜드로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설 자리도 없이 소비자들이 잃어버리게 된다. 아예 과거의 것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 땅에 묻혀 버린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특별전에서 보인 것과 같은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긴 하지만, 과거의 물건을 찾고 거기에서 자부심이나 자기만족을 느끼는 몇몇 동호회의 멤버처럼 극히 한정된 범위에서만 그런 재활이 일어날 뿐이다. 한국과 미국에서 자전거의 대명사였던 '삼천리'나 '슈빈(Schwiin)의 경우, 다양한 기능과 고성능의 자전거 브랜드들이 나오면서 잃어버린 브랜드를 잃어버렸다. 삼천리는 겨우 레저에 초점을 맞춘 '레스포(Lespo)'로 제한된 성공을 거두기는 하였지만.
 

      감성적인 혜택을 가지고 소비자와 연대를 갖지만, 그 감성적인 유대를 포장하여 알리는 방법이 적절치 못하거나 현저히 부족한 경우에 브랜드는 잊혀지게 된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잊혀진 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기억을 복원시킬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박카스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생각한다. 약국의 매대나 냉장고에 자리를 잡고는 있었지만, 브랜드로서는 거의 잊혀진 존재였다. 그것이 적극적인 커뮤니케이션 활동을 통하여 '피로회복 → 젊음의 활력'이란 감성적 속성을 지닌 브랜드로 부활할 수 있었다.

 

      한 때 시장을 이끌었던 나의 브랜드가 정말 소비자들의 마음 속에서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거나, 도저히 회복시킬 가망 없이 '잃어버린' 것인지, 소비자들의 마음의 눈에서 잠시 비껴 서서 '잊혀진' 것인지가 브랜드의 상황을 규정할 수 있는 기준으로, 브랜드 진단의 출발점으로 활용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메트로폴리탄 특별전 기획자들처럼 함부로 자신만의 편협할 수도 있는 잣대를 가지고 속단해서는 아니 되겠지만.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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