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미스김의 성공?

입력 2004-05-14 10:38 수정 2004-05-14 10:38
"은재와 영훈은 3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천재성향이 다분해 현실성이 결여된 인물, 영훈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알뜰한 은재와의 결혼 하루 전, 뜻밖의 제의를 받게 됐던 것이다. 사장 조카인 우경이 팀장으로 간 공조시스템 개발회사에서 만난 영훈은 천문학자를 꿈꾸는 남자였다.... 결혼식날 신부대기실에서 퀵서비스맨에게 영훈의 편지를 받은 은재는 대타로 나온 무열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을 뛰쳐나가게 된다..... 무열은 사업을 하는 아버지 품에서 걱정없이 자란 허랑방탕한 젊은이....... 사진을 찍는답시고 아프리카행을 꿈꾸던 그에게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그것은 바로 아버지 회사의 부도. 모든 재산이 넘어가고 별장까지 사채업자의 손에 넘어간 상황에서..."



SBS 홈페이지에 실린 `파란만장 미스김의 10억 만들기`라는 드라마의 줄거리입니다. 간추리자면 `돈 때문에 결혼을 파기한 남자를 되찾고자(?) 10억을 모으러 나선 여주인공과 우연히 그의 삶에 끼여든 한 남자의 밀고 당기는 사랑 이야기` 정도 되는 셈이지요.



아무리 허구라지만 드라마의 내용은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청첩장을 돌린 뒤 깨지는 결혼이 있다곤 하지만 결혼이 당사자만의 일이 아닐진대(둘 다 천애고아라면 또 모르겠지만) 당일날 퀵서비스맨을 이용한 연락이라니요. 그렇다고 신부가 사진사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을 뛰쳐나온 것도 모자라 처음 만난 남자에게 여관방인지 호텔방에서 신부머리하느라 꽂은 머리핀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으니 빼달라고 조른다구요.



선 보고 조건 따져 하기로 한 결혼도 아니고, 3년동안 연애하고 결정한 결혼을 돈 때문에 깬 남자를 되찾기 위해 물불을 안가린다구요.그것도 돈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면 마음 한구석에서 "정말 옳은 선택일까, 잘살 수 있을까. 혹시 실수하는 건 아닐까" 불안하고 초조한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혼수문제를 비롯한 크고 작은 의견 차이와 사소한 감정싸움으로 내심 수없이 망설이고 그러다 보면 평소 무심코 대하던 다른 사람이 괜찮아 보여 "확 그만둬 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하지요. 최악의 경우 깨질 줄 알면서도 강행하는데 이는 하객을 불러놓고 결혼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고 난 뒤 갈라서는 게 부모님을 비롯한 주위에 덜 망신스럽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도 여기까진 그렇다 치지요. 20대 여자 회사원이 짧은 기간에 10억원을 모은다구요? 대학 졸업하고 시중은행의 파트타이머나 임시직으로 근무해야 월 70만-80만원이 고작이고 웬만한 회사의 정식직원도 한달에 2백만원 받기 빠듯한 마당에 10억원, 그것도 물값 전기값 아까워 하는 자린고비 정신만으로 말입니다.



10억원이란 숫자는 아마 요즘 유행하는 `10억원 모으기` 바람에서 빌려왔겠지요. 그러나 10억원을 모으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인가요. 1백만원이 안되는 돈을 못갚아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이 전체의 10%가 넘는 37만3천여명, 1백만원이상 5백만원 미만이 그 두배가 넘는 80만8천여명이고 이들 대부분이 20대라는 게 현실인데요.



이것도 봐주지요. 드라마는 세태나 유행, 사람들의 희망사항을 반영할 수 있는 거니까요. 도대체 어떤 직장에서 여직원을 아직도 `미스김` `미스리`라고 부르는지요.SBS에선 여직원 여자PD 여자기자를 미스김 미스리라고 부르는 걸까요. 설사 그렇다 해도 공중파방송 드라마 제목에 `미스김`이라니요.



SBS는 70년대 이래 오랫동안 기업체나 기관 여직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이 지적된 `시정돼야 할 사항`이 미스00라는 호칭문제였다는 걸 모르는 걸까요. 알면서도 "그까짓 것, 여자들 호칭쯤"하는 것일지요.



뿐인가요. 이른바 `줄거리`를 보면 남자인 무열과 영훈의 직업에 대해선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반면 여자인 은재, 아니 미스김은 뭘 하는지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알뜰한`이 설명의 전부입니다.



세상에! 남자는 직업도 있고 꿈도 있는데 여자는 꿈은커녕 직업도, 직장에 대한 설명도 없이 그저 `현실적이고 알뜰한`이라니요. 그리곤 첫회부터 웨딩드레스를 입은채 신랑감에게 일방적으로 채인 기막힌 상황에서 처음 보는 남자에게 머리핀을 빼달라고 떼를 쓰는 `망가진` 여자로 나오다니요.



드라마가 현실적이면 재미없을지 모릅니다. 케이블TV 곳곳에서 방송되는 일본드라마의 경우 "그저 그렇다"는 평을 듣는 건 우리 드라마처럼 얽히고 설키고 꼬이지 않은채 현실적인 삶을 그려내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드라마, 특히 SBS 드라마가 가는 길의 끝은 과연 어디쯤일까 궁금하기만 합니다.



한 여자를 둘러싼 깡패와 재벌2세의 삼각관계,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주인공을 둘러싼 집안끼리의 암투라는 공식에 출연배우들의 얼굴만 바꿔 대입하는 듯한 최근의 SBS드라마에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여자`는 없습니다. 기껏해야 불쌍해서 보호받아야 하는 애완동물같은 존재나, 있는대로 망가져서 보는 사람을 웃기는 삐에로같은 인물만 있지요.



드라마는 시청자의 요구 내지 희망사항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자의 사랑과 성공을 얘기한다고 해놓곤 결국엔 신데렐라 만들기에 연연하는 것,두 남자의 사랑을 주체 못하는 여주인공 시리즈를 만드는 것 모두 현실이 아닌 신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서라고 우길 수도 있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고단한 현실에 지친 여성들을 위로한다는, 터무니없는 핑계로 현실에 없는 신데렐라 만들기로도 모자라 삐에로같은 역할을 내세우곤 `미스김`이라는 시대착오적 제목을 버젓이 붙이는 건 용서하기 힘듭니다.



"두 남녀가 계속되는 실패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가며 성공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극복해내는 삶의 희망과 사랑을 이야기한다"라는 기획의도는 더더욱 괘씸하게 느껴지구요. 적어도 제가 생각하는 희망과 성공은 이 드라마에서 주장하는 그런 게 아니니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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