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죽이는 '여자의 유희'

입력 2007-01-15 09:47 수정 2007-01-15 09:47
남자를 죽이는 '여자의 유희'

-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쇼핑 -

 

      대부분 주말이면 처(妻)와 함께 대형 할인점에 가서 장을 본다. 결혼하여 이렇게 함께 장을 보러 다닌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모든 점에서 내게는 어색함이 묻어 나온다. 처음 주차장에서 매장으로 들어서기 전에 쇼핑카트를 챙길 때부터 그런 어색함이 드러난다. 서로 공동운명체임을 강조하듯이 데모할 때처럼 스크럼을 짜고 있는 쇼핑카트를 100원 짜리 동전 하나로 손쉽게 꺼내는 동작도, 100원인지 500원인지부터 헷갈리기 시작하여, 동전을 꺼내는 동작이 성급하게 쇼핑카트를 꺼내려 끌어 당기는 동작과 엉키기 일쑤이다. 이번에 간 곳은 아예 쇼핑카트 도우미를 배치하여, 그 도우미에게 카트를 인도받으면 되는데, 흡사 또 다른 절차가 하나 더 들어간 듯 더욱 헷갈리게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한 손은 동전을 꺼내려 주머니 속의 지갑을 찾고 있었는데, 다른 한 손과 몸은 도우미가 건네 주는 카트를 받으려 하면서도 한 편으로 다른 카트를 직접 끌어내려고 카트 쪽으로 다가서며, 양쪽으로 분열되어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이다.

 

      이제는 그런 대형 할인점에 가면 나이를 떠나서 부부가 함께 장을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이 자리를 잡은 것 같지만, 쇼핑카트를 맡고 있는 대부분의 남자들의 모습은 아직도 쇼핑카트를 꺼낼 때의 나처럼 어색하고 불안한 구석이 있다. 뭐 하나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이, 아내의 짐꾼이 되어 부르는 대로 '예이' 소리만 없지, 딴에는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고, 뭐 하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까 싶어 집어 들어 보는 데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며, 거기서부터 카트에 직접 담기 까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그보다 더 긴 여로를 거쳐야 한다.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는 시식코너마다 들러서 부인을 부르고 같이 간 아이까지 챙겨 먹이는 모습은 어찌 보면 그 어색함을 떨치고 가장으로서의 자신을 애써 확인하고 싶은 몸부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부인과 함께 가서도 그러할 진대, 심부름을 하러 혼자 갈 경우에는 어떠할까? 처음에 호기있게 매장에 들어서기는 한다. 구입할 품목의 숫자라야 네 가지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리스트 메모를 작성하고 할 필요도 없이, 머리 속에 차곡 정리해 놓았고, 심부름이야 동네 앞으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매장내 지리도 완벽하게 익히고 있다. 하지만 정작 구입할 물품들이 놓여 있는 매대 선반 앞에 서면서 당황하기 시작한다. 동일 물품인데 브랜드들이 너무 많고, 너무 세분화되어 있어 무엇을 골라야 할지 가늠을 할 수 없다. 계란 한 줄을 사오라고 했는데, 우리 나라 거의 모든 식품회사 상표에서 계란을 내고 있고, 그 안에서 '유정란'과 '무정란'이 나누어지고, 먹이에 따라 '솔잎', '차', '인삼' 등을 먹였다고 나누어 놓았고, 'DHA'는 무엇이며, '왕란'은 얼마나 무엇이 크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게다가 어떤 것은 행사기간이라고 한 줄에 한 두 개를 더 붙여 주고 있으니 결정을 내리기가 더욱 힘들다. 이런 상황을 한 품목 살 때마다 비슷하게 겪게 되고, 품목 하나 살 때마다 집으로 전화를 해서 물어 보게 되고, 타박을 들으며 겨우겨우 한 품목씩 사다가 결국 어느 하나는 완전히 잊어 버리고 가서, 더 큰 타박을 듣곤 한다. 남편의 권위가 절대적이었을 것 같은 1950년대에도 어느 한 켠에서는 이런 모습이 있었던 것 같다. 김수영 시인의 「마아케팅」이란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특이하였을 제목의 시를 읽으며 빙그레 웃음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비니루, 파리통,
그리고 또 무엇이던가?
아무튼 구질구레한 生活必需品
오 注射器
2cc짜리 國産슈빙지

 

그리고 또 무엇이던가?
오이, 고춧가루, 후춧가루는 너무나 창피하니까
고만두고라도
그중에 좀 점잖은 品目으로 또 있었는데

 

아이구 무어던가?
오 도배紙 천장紙, 茶色 白色 靑色의 모란꽃이
茶色의 主色 위에 탐스럽게 피어있는 천장지
아니 그건 천장지가 아냐(壁紙지!)
천장지는 푸른 바탕에
아니 흰 바탕에 엇걸린 벽돌처럼 삘딩 창문처럼
바로 그런 무늬겠다

 

아냐 틀렸다 벽지가 아니라
아냐 틀렸다
그건 천장지가 아니라
벽지이겠다
더 사오라는 건 벽지이겠다
그러니까 모란이다 모란이다 모란 모란......

그리고 또 하나 있는 것 같다
주요한 本論이 네 개는 있었다
비니루, 파리통, 도배지......?
주요한 本論이 四項目은 있는 것 같다
四項目 四項目 四項目......(면도날!)

- 김수영, 「마아케팅」(1962) 전문 -

 

      '구질구레한 생활필수품'이란 구절에 궁핍한 생활의 안쓰러움이 느껴지고, '오이, 고춧가루, 후춧가루'가 너무나 창피한 품목으로 들어가는 데서는 당시의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역시 안쓰러운 자존심이 느껴진다. 그리고 천장지와 벽지가 헛갈리기 시작하고, 겨우겨우 마지막으로 가장인 개인에게 필요한 품목을 가까스로 생각해내는 60년대 초 시인의 삶이 그 품목들의 명세가 약간 달라서이지 장보기 심부름을 하는 모습과 심리 상태는 근본적으로 지금 우리네 남정네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그에게 장을 보고, 라디오를 비롯한 새로운 물품들을 거침없이(?)-최소한 그의 눈에는- 사들이는 부인의 행태는 놀랍기도 하면서, 남편인 자신은 소외되고 작아지는 것만 같다.

 

어제는 캐시밀론이 들은 새 이불이

어젯밤에는 새 책이

오늘 오후에는 새 라디오가 승격해 들어 왔다

 

아내는 이제 이런 어려운 일들을 어렵지 않게 해치운다

결단은 이제 여자의 것이다

나를 죽이는 여자의 유희다

- 김수영 「금성라디오」(1966) 중에서 -

 

      사야 할 것은, 사고 싶은 것은 내심 많은데, 선뜻 사기에는 주머니 사정도 그렇고 행위 자체가 마냥 서툴기만 하여 머뭇거리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물질적인 것을 갖추면 갖출수록, 자신의 정신적인 면이 황폐화되는 것만 같다.

 

삭막한 집의 삭막한 방에 놓인 피아노

그 방은 바로 어제 내가 혁명을 기념한 방

오늘은 기름진 피아노가

덩덩 덩덩덩 울리면서

나의 고갈한 비참을 달랜다

- 김수영 「피아노」(1963) 중에서 -

 

      『김수영, 혹은 시적 양심』(이은정, 살림, 2006)에서 평론가 이은정이 표현했던, 물론 그 전에도 많은 평론가들이 김수영을 평하면서 비슷하게 얘기했지만, '서늘한 이상을 추구하려는 시인의 정직한 고뇌와 끈적한 일상을 떨어버릴 수 없는 소시민적 삶의 태도 사이에서 끊임없이 머뭇거렸던, 즉 혁명가적 시인과 일상적 속인이라는 김수영의 맨 얼굴', 거기에 비추어진 광고, 그리고 그 광고가 상징하는 자본주의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자본주의'와 '시'의 연결고리란 정말 어설픈 광고 이외에는 없는 것일까?

(계속)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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