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사는 외국인에게 `어떤 때 한국인이 다 됐다고 생각하는가`를 물었더니 `두루마리 화장지가 거실에 놓여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때`와 `괜히 일본이 미울 때` 등의 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땅에 사는 외국인이 그럴 진대 한국인은 어떻겠습니까. 특별한 이유 없이도 괜스레 일본이 미운 게 당연하지요.



저 역시 같습니다. `무라카미 류` 등의 일본작가에 대해 틈만 나면 "엽기적이고 퇴폐적이야"라고 흉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구요. 실제 일본 대중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묘사가 많습니다. 그런 걸 대할 때마다 123부대의 생체실험 얘기가 떠오르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지요.



일본 영화나 방송 개방에 대해 거부감을 지녔던 것도 그런 선입견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일본만화로 인해 아이들 사이에 가뜩이나 엽기적인 정서가 퍼져 있는데 영화나 드라마까지 개방되면 우리 청소년들에게 한층 더 몹쓸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겁나고 두려우니까요. 때문에 `쉘 위 댄스` `으랏차차 스모부` `음양사` `도플갱어`같은 일본영화를 보면서도 "저런 건 일부겠지. 실제론 끔찍한 게 훨씬 더 많겠지" 식의 생각을 지우지 않아 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일본문화 개방은 본격화됐고, 우리 안방에 일본드라마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아직은 케이블TV 위주지만 어쨌거나 아침 저녁으로 황금시간대에 일본드라마가 여기저기서 방송되고 있습니다.



`춤추는 대수사선`도 그중의 하나지요. 97년 후지TV에서 11부작으로 방송됐던 것이라는데 컴퓨터회사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다 경찰이 된 아오시마와 여형사 스미레, 일본 경찰조직의 핵심인 캐리어조의 일원이지만 지방대 출신이어서 동경대 출신과 경쟁하느라 애쓰는 수사담당관 무로이 등이 등장하는 수사물이지요.



아오시마는 멋진 범인검거를 꿈꾸지만 큰 사건은 본청이 맡고 관할서에선 그들의 안내나 합니다. 아오시마는 덤벙대면서 윗사람 눈치를 보고, 같은 서의 과장 계장 또한 가능하면 사건이고 책임이고 다른 곳, 다른 인물에 떠넘기려 합니다. `투캅스` 비슷하지요. 여형사 스미레만이 어떻게 하든 범인을 검거하려 애씁니다.



어쨌거나 조서작성 장면을 보면 컴퓨터는 고사하고 타자기도 없이 종이와 연필을 들고 있는데 당시 일본에선 정말 그랬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보다 훨씬 전인 93년에 만들어진 `투캅스`에서도 타자기로 조서를 꾸미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이 드라마를 보면서 제 마음은 복잡해졌습니다. 현실적인 상황묘사와 대사에 "어어..." 싶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엔 범인 검거와 관련된 극적 장면보다 경찰조직을 둘러싼 현실 묘사가 더 많습니다. `조직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지요.



엊그제 제가 케이블TV를 통해 본 시리즈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날치기사건을 수사하던 여형사 스미레는 범인이 경찰 고위간부의 아들인 걸 알고 검거하려 하지만 윗선에서 사건을 은폐하려 들자 언론에 내용을 공개하겠다고 나섭니다.



간부들은 스미레를 회유하고, 날치기사건 범인에 의해 지금도 매주 화요일 스토킹을 당하는 스미레는 `그럴 수 없다`고 맞섭니다. 결국 본청의 수사담당관 무로이가 등장, 범인을 데려올 테니 검거하는 걸로 하는 대신 언론엔 알리지 말 것을 타협안으로 제시합니다. 스미레는 "여긴 경찰서지 정치판이 아니다"라고 타협하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승복하지요.



무로이는 검찰에 넘겨봤자 불기소처분일 것이라고 하지만 스미레는 얘기합니다. "불기소는 검찰 일이고 경찰 일은 범인을 잡아 넘기는 겁니다." 여기서 아오시마는 말합니다. "경찰은 회사와 다를 줄 알았는데 똑같다. 회사 다닐 때 사장조카가 사고쳐 노조에서 들고 일어났는데 보너스주고 무마했다. 나도 받아 챙겼지만. "



범인은 선글라스까지 끼고 변호사와 함께 뻔뻔스레 등장합니다. 스미레가 조서를 작성하기 위해 마주 앉지만 범인은 "제가 그랬고 반성하고 있습니다"만 되풀이합니다. 동석한 무로이는 "초범인데다 자수하고 반성하니 불기소일 게 뻔하다"고 하지요. 범인의 건방진 태도를 참다 못한 아오시마는 멱살을 움켜쥔 채 "너를 봐주는 건 부모와 친구뿐이다. 다시 걸리면 죽을 줄 알라"고 소리칩니다.



범인은 변호사 앞에서 "폭행당했다"고 큰소리치지요. 무슨 일이냐고 묻는 변호사들에게 무로이는 "그런 일 없었다"고 잡아뗍니다. 아오시마가 쫓아나오며 "고맙다" 고 하자 무로이는 "너는 규칙을 어겼다. 다음부터는 안봐준다"고 말합니다.



아오시마와 헤어져 걷던 무로이는 중얼거립니다. "꼭 맨위로 가야지." 그런가하면 아오시마는 "고맙다"는 스미레에게 말합니다. "오늘 하루는 정말 난리였어요. 구역 침범한다고 난리, 사건 은폐한다고 난리."



이 드라마엔 신화가 아닌 현실이 있습니다. 헐리우드가 만드는 `과학수사대`가 치밀하고 철저한 미국식 소영웅을 보여준다면, `춤추는 대수사선`은 엘리트주의와 관료주의가 판치는 일본 경찰의 단면과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동양적인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근사한 형사가 되고 싶긴 하되 실천엔 못미치는 아오시마와, 인간적인 면을 갖고 있으되 어떻게든 잘난 경쟁자를 물리치고 맨위로 가고 싶은 무로이와, 적극적이고 반듯하지만 여자라는 한계에 시달리며 힘들어 하는 스미레가 등장하는 이 드라마는 보는 동안 그것이 일본것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듭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저는 두렵습니다. 이렇게 일본 영상물에 물들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러다 다른 드라마, 성에 관한 노골적인 표현이 스스럼없이 등장하고, 문득문득 포르노장면같은 게 나오는 것들에 대해 거부감이 덜해지면서 일본적인 모든 것들에 자연스레 익숙해질지도 모르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문화전쟁이 무섭다고 하는 것도 모르는 새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거니까요. 제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요.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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