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역(拒逆)할 수 없는 운명(運命)

 

      1997년 그 미쳐 지냈던 여름, 미국 친구들과 해외에서 쓰일 삼성의 브랜드전략을 만들며 미국 쪽의 대표를 맡고 있던 친구가 마지막 원고에 제목을 붙였다. "Destiny Realized".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는 제목이었다. 먼저 삼성이라는 브랜드가 당시까지의 그저 선진 기업이라는 곳을 따라서 모방제품을 만들던 저급의 이미지를 벗어나, 세계 최고의 반열에 우뚝 서는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는 운명을 깨닫고 그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는 정신적인 각성을 촉구함이 전하고자 한 의미의 첫째였다. 두 번째는 브랜드로서 삼성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역시 싸구려 모방제품만을 양산해내는 것으로만 알려진 한국의 이미지를, 역경을 떨치고 일어선 불굴의 정신과 그것을 실제 제품에 실현시키는 의지를 지닌 한국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만들어야 한다는 운명을 자각하여, 그것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Destiny Realized"를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이 글의 제목처럼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약간 의역을 하였다. 이렇게 의역을 하게 된 데에는 개인적인 배경도 있다. 나는 1989년 5월에 삼성전자에 입사를 하였다. 그 해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책없이 놀고 있다가-사실상 따지고 보면 전 해 12월부터 논 셈이다- 우연히 삼성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과 동기들 중에는 지금과 같은 청년실업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던 시기도 아니었는데, 그래서인지도 모르겠지만 나같은 부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요즘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은회(謝恩會)'라고 마지막 학기가 끝나고 선생님들을 모시고 감사 모임을 갖는데, 동기 졸업생들 중에 취직이 확정된 자는 한 놈 밖에 없었다. 그런 형편을 여유있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 주셔서 감사 드린다고 천연덕스럽게 인사 드리고는, 못난 놈들은 서로 모여 쳐다 보기만 해도 좋아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서로들 낄낄거렸었다.

 

      그리고는 갈 데없는 놈들이 모여서 테니스도 치고, 술자리도 갖고, 가뭄에 콩 나듯 치기 어린 토론도 벌이곤 했는데, 그런 생활에 지쳤는지 4월이 되어 대기업들의 하반기 입사공고가 나자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서로들 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하고 있는데, 특히 함께 붙어 지내던 친구 하나가 삼성에 원서를 내는데, 원서 접수하는 데 까지만 같이 가자고 흡사 여자 애들 미용실 같이 가자고 하듯이 집에 찾아와 졸랐다. 못 이기는 체 따라 나서려니 그 친구가 가는 김에 함께 원서를 내자고 하며 내 몫으로 원서 여분을 가지고 왔다고 해서, 집에서 원서를 함께 작성하고 이후 지금의 입사시험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간단한 시험과정을 거쳐서 입사를 하게 되었다. 정말 친구 따라 강남에 간 격이었다. 정신없이 회사를 다니다가 MBA과정까지도 역시 그 친구를 따라서 갔다. MBA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원래의 계획과는 다르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결국 제일기획에 입사를 하게 되었고, 삼성의 해외전략을 맡게 되었다. 그 일련의 과정이 내가 적극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밀고 나간 것도 아니었다.

 

      비슷한 운명을 지녔던 소설 속의 한 인물이 생각났다. 이병주(李炳注)의 『지리산』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박태영이었다. 희대의 천재라고 할 수 있는 박태영은 일제말 징병을 피하여 지리산으로 도피한다. 먼저 지리산에 숨어 들어와 있던 청년들과 '보광당(普光黨)'이란 조직을 만들어 반(半)게릴라 활동을 벌이며 일종의 해방구를 일구어 낸다. 조선공산당의 거물이었던 이현상이 또 입산을 하여, 그들 무리의 정신적인 스승 역할을 한다. 해방이 되자 이현상은 보광당을 조직했던 무리들 모두를 공산당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연설을 하고 서울로 떠난다. 박태영은 자신의 운명이 엉겹결에 정해져 버렸다는 것에 일말의 회의를 느끼면서도,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한다. 이후 박태영은 심적으로는 계속 공산당원이라는 것에 회의를 품고, 때로는 완벽하게 전향할 수 있는 수 차의 기회를 뿌리치면서, 그 때마다 공산당원으로서 자신을 담금질하고 결국 지리산에서 최후의 공산당원, 최후의 빨치산으로 생을 마친다.

 

      나는 박태영과 같이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나의 사회 생활의 첫 선택에 대해 나름대로 책임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뭔가 삼성과의 피할 수 없는 연이 있다면, 그 자체를 받아들이며 도전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 1997년 위의 제목을 만들 당시 함께 일했다가, 그 일이 끝나자마자 소식이 끊어졌던 친구가 하나 있었다. 1년 반 동안 전혀 연락이 없다가 1999년 초 그 친구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디지털과 관련하여 미국 업체 몇 군데에 함께 일할 것을 제의하는 편지를 내 명의로 몇 군데에 보내고, 만나기도 했는데, 그 중 한 업체에서 자신들이 대응하기가 힘들자 협력관계의 한 회사에 내가 쓴 편지를 넘겼다. 그런데 '97년에 함께 일했던 그 친구가 바로 문제의 회사에 근무하면서, 나의 편지를 넘겨 받은 당사자가 되었다. 1년 반만의 전화를 통한 대화에서 그 친구가 했던 한 마디를 잊을 수 없다. "I realize there's Samsung in my bone(삼성이 내 핏속에 흐르고 있는 것 같아)". 삼성과 관련된 일을 하려고 부러 애를 쓴 것은 아니었지만, 해야만 하는 운명으로 받아 들였다. 삼성의 해외 커뮤니케이션 부문 일을 하게 되었을 때의 나의 심정과 똑같았을 것이다. 그런 심정을 '97년에 약간 과장스럽게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요즘 브랜드 관련해 강의를 할 때 제목으로 자주 쓰고 있다. 자신이 맡은 브랜드가 진정으로 강력한 힘을 지닌 브랜드로 설 필연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그 과정의 주역이 되어야 하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브랜드 일을 하도록 촉구한다. 정작 그 말을 하는 작자는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 자신의 의지라는 것조차 없이 브랜드 일을 했기에, 이런 말을 하면 얼굴 뜨거워지기도 하지만, 실제 브랜드라는 것의 성패는 구성원들의 의지와 열망의 정도에 달렸다고 본다.
 

      한참 손금공부를 열심히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들은 얘기 한 토막. 일본의 어느 하층 사무라이가 손금을 잘 보는 사람에게 찾아갔다. "당신은 운명선이 올라가다가 막혀서 출세하기는 글렀소이다"라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얘기를 들었다. 다음 날 이 무사가 다시 그 손금 보는 사람을 찾아와 손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막혔던 운명선을 칼로 파서 연장을 시켜 놓았단다. "당신의 그런 의지면 안 될 것이 없소"하며 손금 보는 사람이 예를 갖추어 절을 했고,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는 이야기이다. 거의 비슷한 얘기가 젊은 시절 열심히 관상을 공부한 김구 선생에게도 있다. 손금이 좋게 칼로 그었다는 똑같은 얘기도 있지만, 유명한 것은 '관상보다 마음이 중요하다(觀相不如心相)'는 말씀이다. 일본 무사의 출세나 김구 선생을 사후(死後) 60년이 되도록 우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기리도록 한 것은 손금이 아닌 굳은 의지와 그에 따른 행동이었다.

 

      브랜드도 마찬가지이다. 잘 조직된 시스템이, 정교하게 만든 광고가, 유명한 모델 하나가 강한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운명처럼 자신의 브랜드에 매진하는 구성원들의 가슴으로부터의 합의에 기초한 노력이 바로 위대한 브랜드를 창조하는 것이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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