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의 마술과 진실

입력 2004-04-09 14:01 수정 2004-04-09 14:01
살다 보면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못하던 일을 갑작스런 사정 때문에 부랴부랴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마 전 제가 그랬지요. 봄이니 "침대보도 좀 갈고, 이것저것 잔뜩 늘어져 있는 화장대도 좀 치워야지" 생각하면서도 그날그날 일에 쫓겨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던 중에 미국에 사는 시동생이 학회 세미나 참가차 온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귀국시간은 오후 4시 50분. 그날 따라 꼭 참석해야 하는 산행이 있어 청계산에 올랐다 돌아온 시간은 오후 4시. 남편이 공항으로 떠난 뒤 제 `작은 전쟁`은 시작됐습니다. 모처럼의 한국나들이인 만큼 다소 넓은 안방에서 머물게 하자고 작정하니 침대보도 갈아야 하고 욕실에 딸린 작은 화장대도 치워야 했지요. 거실과 화장실 청소도 물론 해야 했구요.



거실을 정돈하고 침대보와 베갯잇을 바꾼 다음 화장대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꼭 예의를 차려야 할 경우가 아닌 한 맨얼굴로 다니기 일쑤고 화장을 할 때도 후다닥 하느라 화운데이션과 콤팩트 대신 투웨이케익으로 해결하는데도 화장대엔 갖가지 화장품이 그득했습니다.



몇 번 바르다 만 로션과 크림, 3분의2 이상 남은 화운데이션 아이쉐도우 콤팩트 가루분 볼연지, 작년 여름에 바르던 자외선 차단제, 각종 립스틱, 향수, "기미 잡티가 싹 없어진다"는 말에 "혹시나" 하고 사들였다 반도 못쓴 비타민C 앰플에 욕심껏 챙긴 샘플까지.



"뭐가 이렇게 많은가"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으므로 일단 스킨과 보습제 화장솜통, 남편의 스킨과 로션, 머리빗통만 남기고 싹 치우니 화장대가 그렇게 깨끗할 수 없더군요. 시동생은 다음날 떠났지만 화장대는 깔끔한 그대로입니다. 화장대 위에 놓인 것만으로 충분한 까닭이지요.



문득 "그동안 화장대에 쌓여 있던 건 다 뭐였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장을 정성들여 하는 편은 아니지만 화장품의 필요성이나 화장의 마술(?)을 부인하는 `안티 화장파`는 결코 아닙니다. 기왕이면 맑고 깨끗한 피부, 화사한 얼굴을 갖고 싶은 마음 굴뚝같으니까요.



여름용 겨울용을 따로 쓰는 정도는 아니지만 바르면 주름이 줄어든다는 광고에 혹해 `레티놀 제품`을 사고, "몰라보게 뽀얘진다"는 얘기에 `화이트닝 세럼`을 사본 것도 그렇게라도 하면 좀 젊고 예뻐질까 싶어서였지요. 그러나 레티놀크림은 뾰루지가 생겨 절반도 못쓴채 뒀다 결국 버렸고, 화이트닝세럼은 아까워 겨우 끝까지 발랐지만 효과는 그저 그랬습니다.



잠들기 전 피곤하다는 핑계로 세안을 공들여 안하는 탓인지, 바깥일과 집안일을 함께 하는데 따른 스트레스 때문인지, 사무실 공기가 나빠서인지 지금도 얼굴에 뭐가 자주 납니다. 크고 붉은 여드름은 아니지만 손으로 만져보면 잡히는 작은 피지덩어리가 생기는 것이지요.



일단 뭐가 나면 가만 두지 못하고 짜게 됩니다. 젊었을 땐 쥐어짜도 딱지가 떨어지면 괜찮았지만 이젠 한번 건드린 곳은 그대로 거뭇거뭇 자욱이 남습니다. 결국 기초화장품 가운데는 화장수와 보습제 아이크림 외엔 바르지 않기로 했지요.



제가 특수한 경우일까요. 시중의 화장품 종류가 그리도 엄청나게 많은 건. "혹시나"하고 욕심내 받아온 샘플을 보니 기초화장품 종류만 많기도 많더군요. 스킨 로션 에센스 보습제 아침영양크림 밤영양크림 수분크림 주름개선크림 즉석리프트크림 아침아이크림 밤아이크림 목크림 핸드로션 보디로션 클렌징로션 아이클렌징로션 각질제거크림 자외선차단크림...아이고!



하기사 요즘 유행한다는 저가화장품 대리점의 경우 판매하는 종류가 5백종이 넘는다니 이 정도는 약과일른지 모르지요. 게다가 철마다 새 제품이 쏟아지니 5백종 아니라 1천종이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지요. 화장품 시장 규모가 연간 5조원에 달하는 것이나 불황 속에서도 화장품 신규브랜드는 계속 늘어나는 걸 보면 화장품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만하구요.



뽀얗고 말간 피부미인이 못되니 화장품 종류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는 지 모릅니다. 아무리 그래도 20대 여성들에게 7-8가지 기초화장품이 필요하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30대 혹은 40-50대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구요.



값비싼 주름개선제와 화이트닝 제품만 쓰면 잔주름도 없고 잡티 죽은깨 기미가 싹 사라진다면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그야말로 땡빚을 내서라도 사서 발라야지요. 그러나 피부란 적절한 운동과 식생활 조절, 정성스런 맛사지 등엔 다소 영향을 받지만 화장품에 의해선 크게 달라지는 것같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 경험으론.



비싸고 안비싸고를 떠나 화장품은 기초 몇 가지만 빼곤 바닥까지 쓰게 되는 일이 적어 보입니다. 아이쉐도우같은 색조화장품은 특히 그렇지요. 옷은 입다가 싫증나면 깨끗하게 손질해 다른 사람을 줄 수도 있지만 화장품은 일단 손대고 나면 남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결국 여기저기 굴러다니다 버려지기 십상이지요.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 복숭아빛 피부를 원하는 소망을 탓할 순 없습니다. 여자라면 누구도 그같은 바람에서 벗어나기 힘드니까요. 그렇더라도 화장품이 모든 걸 해결해주리라는 `순진함`에선 그만 헤어날 때도 되지 않았을까요. 세상 어느 나라에서 대학 새내기들에게 `공짜 맛사지`를 대가로 수십만원에서 1백-2백만원 어치의 화장품세트를 팔른지요.



값이 싸도 제대로 안쓰면 낭비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싸다는 생각에 꼭 필요하지도 않은 걸 이것저것 사들였다 버리면 돈도 돈이려니와 환경을 해치는 일에 다름 아니구요. 각자 필요에 따라 맞는 화장품을 고르되 정말이지 화려한 광고와 유행,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휩쓸려 너무 많은 화장품을 사들이진 말았으면 싶습니다.****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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