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니스(Janis)와 술을

 

      서울교육대학교 앞 쪽에 가끔 들르는 술집이 하나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내부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는 DJ 박스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LP판들이 1980년대의 음악다방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인데, 서울대학교 교수를 하는 친구 김모군의 인도로 2년전에 처음 들렸다. 일 관련하여 오랜만에 만나서 그냥 헤어지기 뭐한 차에 김모군이 80년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말과 함께 손을 잡아 끌며 들어선 후,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교수도 때로는 접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단다. 그런데 돈도 그렇고 체면도 있고, 회사에서 하듯이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한데, 접대를 받을 사람들이 그래도 대충 우리 또래나 약간 위인데 이 곳이 추억을 불러 일으키며 감성적으로 어필을 하고, 가격도 약간 비싼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품격도 맞추어 주고 해서 여기를 자주 찾는데, 이제까지 실패해 본 적이 없어." 나도 그 친구처럼 딱히 접대자리가 아니더라도 소개 겸 손님들을 끌고 갔는데 40세 이상의 그룹에서는 실패해 본 적이 아직까지는 없다.

 

      70년대부터 80년대말까지 광화문에서 'XX음악사'라고 하여 레코드점을 하던 분이 갖고 있던 레코드를 그대로 가지고 차린 곳인데, 역시 70, 80년대 음악다방처럼 손님들이 쪽지에 적어서 신청한 곡들을 찾아서 틀어 준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DJ 친구는 단순히 판만 틀뿐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그 점도 맘에 든다. 몇 차례 들르다 보니, DJ가 나의 취향을 알아서 자리를 잡고 앉으면 신청하기 전에 알아서 두 곡 정도를 틀어 준다. 보통 퀸(Queen)이나 비비킹(B.B.King)의 노래를 번갈아서 그리고 고정으로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의 '나와 바비 맥기(Me and Bobby McGee)'를 틀어 준다. '나와 바비 맥기'가 흘러 나오면, 그 때까지의 떠들썩한 대화도 잠시 묻어 두고, 재니스 조플린의 그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체념과 열정이 남부 악센트에 뒤섞여 나오는 때로는 흐느끼는 듯, 때로는 분노한 듯 터져 나오는 목소리와 블루스와 컨추리가 묘하게 조화된 멜로디에 빠져 든다. 그러면서 재니스 조플린의 격정 어린 무대 뒤의 외로움과 그 외로움을 달래고 감추기 위한 음주, 그리고 약물 복용으로 맞이한 그녀의 최후를 생각하며 속으로 훌쩍거린다.

 

      지난 일요일 뉴욕 출장에서 돌아오며, JFK공항 면세점에 들렸다. 초콜렛 등을 사며 목적없이 두리번거리는데, 주류(酒流) 섹션 한 쪽에 버번 위스키에 복숭아 과즙을 약간 섞은 '써던 컴포트(Southern Comfort)'가 진열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실 써던 컴포트를 마셔 본 적도 없고, 어느 술집이나 주류판매점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스쳐 지나간 적은 있었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눈 여겨 본 것도 처음이었다. 물론 그 이름은 확실히 내 가슴 속에 각인이 되어 있었다. 바로 재니스 조플린이 가장 즐겨 마셨던 술이었던 것이다. 써던 컴포트의 홈페이지에 가서 주요 연대기를 보면 1874년 설립된 이래, 10 개 정도의 사건만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1967년에 '재니스 조플린이 써던 컴포트를 가장 좋아하는 술로 꼽았다'라는 항목일 정도이다. 그리고 재니스 조플린의 노래를 주요 레퍼토리로 하는 그룹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팀의 이름은 '써던 컴포트 블루스 밴드(Southern Comfort Blues Band)이다. 재니스 조플린의 음주 모습 혹은 술병을 가지고 찍은 사진들이 몇 개 있는데, 대부분이 바로 써던 컴포트였다. 재니스 조플린과 연관되며 그 마력에 이끌려 크기와 무게조차 부담스러운 써던 컴포트 1리터짜리를 집어 들었다.


 

      솔직히 보통 다음 날 격렬한 두통을 가져다 주곤 하는 과실주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뉴올리언즈를 원산지로 하는, 과실즙이 든 이 강렬한 버번 위스키를 견디어 낼 자신도 별로 없다. 그러나 '나와 바비 맥기' 보컬에서 표현되는 그 절절함과, 노래를 넘어서 재니스 조플린 인생 자체에서의 무절제, 방탕, 허무와 수줍음이 교차하는 남부 텍사스 출신의-한사코 그녀가 부정하고 빠져 나오려 했던- 그 지역과, 시대의 모순을 한 몸에 똑같은 방식으로 담고 표출했던 재니스 조플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뚝뚝하게 길쭉한 햇빛에 그을린 듯한 문자 그대로 좀 어두운 색조를 띈 'Red neck' 빛깔의 그 써던 컴포트를 사서 맛을 보아야만 할 것 같았다.
 

      요즘은 광고에도 브랜드에도 스토리(Story)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스토리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연이 있다'라고 말을 할 때의 느낌처럼, 사실 혹은 물리적인 것 이상의 감성이 스며든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얘기한다. 내가 JFK의 면세점에서 산 것은 40도 짜리의 과실즙과 혼합한 버번 위스키가 아니라, 재니스 조플린의 그 시린 아픔과 그에 얽힌 나만의 추억이었다. 아껴 아껴 두었다가 언젠가 써던 컴포트를 마실 때는, '나와 바비 맥기'의 그 익숙한 멜로디와 재니스의 음성이 또한 녹아서 흘러 들 것이다.

 

※ 재니스 조플린에 관해서는 아래 제일기획 사보에 지금으로부터 3년전에 실은 졸문을 참조하시길.

http://www.cheil.com/cheilfile/cheilhome/report/200206_12.pdf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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