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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브랜드의 진화

TV 브랜드의 진화

 

     한동안 TV 브랜드의 기준이자 지존은 소니(Sony)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에 걸쳐 월남에 갔던 사람들이 귀국길에 꼭 장만해서 갖고 오는 필수품목 중의 하나가 소니 TV였다. 그런 소니 TV 신화의 중심에 ‘트리니트론(Trinitron)’이란 것이 있다. 트리니트론은 기술적으로 얘기하면 전자빔의 주사방식으로, 이전의 쉐도우(Shadow) 방식에서 진일보하여 평면 브라운관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는 소비자들에게 어렵기만 하고, 제대로 소화시키기가 힘든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도 소니의 트리니트론은 ‘선명한 화질’로 소비자들에게 인식되었다. 약간 본질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 자체로도 TV의 지존으로 소니를 등극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트리니트론이란 표시와 함께 소니는 ‘바로 소니 제품입니다(It’s a Sony)’, 대 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이게 바로 소니인데)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란 강한 자신감을 과시할 수 있었다.

 

     다른 제품들도 그러하지만 TV는 특히 소위 기업브랜드의 영향이 컸고, 상대적으로 TV 보급이 늦었고, 경쟁이 치열하지 않았던 우리 나라의 경우 더욱 그러하였다. TV하면 ‘금성’ 바로 ‘골드스타(Goldstar)’였고, 극히 소수의 밀수나 월남 경기를 타고 들어 온 수입품들을 제외하고는 우리 나라 TV시장을 70년대 중반까지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이런 판세를 일거에 전환시킨 것이 1975년 8월에 출시된 삼성의 ‘이코노 TV’이다. 전원을 키고 나서도 형광등처럼 한동안 기다려야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던 당시까지의 TV에 대비하여, 이코노TV는 ‘순간 수상’이란 방식으로, 전원을 켜고 5초 이내에 화면이 나왔다. 이와 함께 TV에서 나오는 열을 낮추는 기능도 첨가하며, 절전형의 경제성을 강조하는 ‘경제적인(Economic)’을 그대로 브랜드 이름으로 내세워, 당시까지의 ‘금성 대 삼성’의 기업 브랜드의 싸움을 순식간에 특정 기능 중심의 제품 브랜드 싸움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다 알다시피 이 전략은 오일 쇼크 뒤의 상시적인 에너지 위기의 시대와 맞아 떨어져 철옹성과 같은 금성 TV의 아성을 깨고, 삼성이 한국 내 TV 1위 업체로 등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글로벌하게는 ‘트리니트론’, 국내에서는 ‘이코노’로 TV시장에서는 기업브랜드에 이은 기능 위주의 소위 ‘서브브랜드(Sub-brand)’의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시장 판세를 완전히 바꿀 정도로 이 두 서브 브랜드의 파장이 워낙 커서 경쟁사에서 열띠게 나름대로 그에 맞설 서브브랜드를 내놓았지만 장기적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잡다하게 늘어서 소리 치는 서브브랜드들에 지친 소비자들은 다시 기업브랜드 위주로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즉 ‘트리니트론의 소니’ 보다는 그냥 ‘It’s a Sony’의 소니 TV를, ‘엑셀런트(Excellent) TV’보다는 삼성TV를 사게 되었다.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기업브랜드 위주의 TV 시장 판도에 변화를 불러 온 것이 마쯔시다(松下)의 ‘가오(畵王)’이다. 트리니트론으로 화질에 있어서는 접근을 불허하는 것만 같았던 소니에, 가오는 그 문자 자체에서 풍기듯이 정면대결을 불사하며, 화질에 있어서 자신의 우위를 증명하는 것으로 평면브라운관을 내세웠고, 한편으로 기술적으로 시대조류를 타고 최초로 위성TV 튜너를 내장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소니로서는 트리니트론을 개발한 평면브라운관의 원조(元祖)로서, 기술 개발에서 앞서고 마케팅에서 뒤진 베타(Beta)를 내놓고도 VHS에 밀려 버린 전철을 다시 밟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소니가 가오의 대항마로서 들고 나온 것이 바로 ‘베가(Wega)’이다. 베가는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으로 처리되던 이미지를 디지털 회로로 통합하여 처리해 주는 기술로, 소니는 새로운 강력한 기술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베가 엔진’이란 표현을 썼으나, 소비자들에게 ‘베가’는 소니의 평면 TV를 일컫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90년대 초중반의 소비자들은 일단 TV에서의 디지털 기술이라는 것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어서 용어 자체가 생소했고, 실제 시장에 아날로그 TV와 디지털 TV를 대별할만한 컨텐츠가 없었고, TV에 동력을 부여한다는 ‘엔진’이란 개념을 받아 들이기가 힘들었다. 이 때부터 TV의 지존이라는 소니의 위상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역시 기업브랜드 위주로 잠잠하던 국내 TV 시장에 새 바람을 불어 넣은 것은 1998년에 출시된 삼성의 파브(Pavv)였다. 파브의 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배경과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정체 기미를 보였던 TV시장에 본격 고급TV라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기존의 삼성으로는 소비자에게 새롭다는 인식을 주기 힘들었는데, 기업브랜드 삼성을 의식적으로 숨기며, 차원이 다른 TV라는 인식을 심는데 성공했고, LG의 엑스캔버스와 소니를 비롯한 외국 브랜드들까지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크고 튼튼한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90년대말 TV시장의 판도를 바꾼 것은 다른 전자 부문도 그러하지만 디지털기술의 보편화였다. PDP, DLP, LCD 등 다양한 방식의 디지털TV들이 나오면서 이 흐름을 누구보다도 빨리, 그리고 강력하게 올인하다시피 한 것이 바로 삼성이었다. 소니나 파나소닉(Panasonic)의 마쯔시다 등이 기존의 시장 지위와 이미지 때문에 무겁게 변신할 수 밖에 없었는데 반해 삼성은 그런 유산 자체가 별로 없어서 훌훌 털고 새롭게 출발하기가 좋았고, 다른 브랜드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판국에 거리낄 것 없이 자신의 디지털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삼성의 거침 없는 발걸음에 주춤거렸던 다른 브랜드들의 반격은 디지털이란 큰 전장에서 전선을 LCD TV로 좁혀서 펼쳐졌다. 샤프(Sharp)가 가장 발 빠르게 TV의 영원한 준거인 ‘화질’을 내세우며 ‘아쿠스(Aquos)’를 일찌감치 2002년에, 소니는 화질을 기본으로 ‘새로움’을 강조하는 ‘브라비아(Bravia)’를 늦기는 했지만 2005년에 출범시켰다. 2004년 TV부문에서만 10억$ 이상의 손실을 본 소니는 브라비아 출시 이후 바로 LCD TV 매출 1위로 올라섰다. 소니의 저력과 소비자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소니에 대한 기대가 브라비아라는 새로운 서브브랜드를 통하여 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TV브랜드 시장은 기업브랜드 중심으로 벌어지면서, 뜸뜸이 새로운 기능이나 유형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서브브랜드 싸움이 일어났다가 기업브랜드로 진정이 되는 행태가 반복되었다. 근래 LCD TV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경쟁은 소니 브라비아가 약진하기는 했지만, 이미 서브브랜드의 특성들이 기업브랜드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LCD TV를 중심으로 한 서브브랜드를 강화시키는 것보다는, 소니의 경우 브라비아에서 받은 탄력을 어떻게 소니라는 기업브랜드의 활력을 되살리는 ‘젊은 피’로 주입을 시킬 것인지, 삼성을 비롯한 다른 기업들은 신비감과 매력이 사라진 디지털을 어떻게 업그레이드시킬 것인가 혹은 어떻게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들어 자신의 기업브랜드의 자산으로 만들 것인가가 과제이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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