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삐라의 추억과 자신감

삐라의 추억과 자신감

 

      군인 출신의 철권 독재자가 지배하던 초등학교 때는 지금 기준으로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일이 많이 벌어졌다. 특히 냉전(冷戰)의 최전선에 서 있던 지리적 환경으로 인하여, 반공(反共) 관련하여 그런 일이 많았다. 조회 시간에 외치는 구호였던 반공도 시간이 흐르니까, 단순히 반대만 하는 것은 약하다고 해서 반공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이기자는 승공(勝共), 그리고 나중에는 ‘초전박살’의 구호와 함께 멸공(滅共)으로 진화(?)해 나갔다. 박멸의 대상으로 공산주의자, 빨갱이를 얘기하다보니 내 또래에서 빨갱이는 뿔이 달린 도깨비인 줄 알았다 운운하는 추억담을 가끔 듣는데, 그것은 내 경험으로는 나중에 과장하여 얘기한 것이란 느낌이 강했고, 그 정도로까지 발전을 하는 데는 상상력이 아주 강하든지, 너무나 순진하든지 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하여간 냉전(冷戰)의 최전선에 선 한반도(韓半島)에서 지금 같으면 코미디와 같은 일들이 하루하루 벌어지는데, 그 중에 하나가 북한에서 선전용으로 뿌리는 소위 ‘삐라’를 학교에 내는 것이 의무처럼 되어 있었고, 삐라 내는 날이 따로 지정이 되어 있었다. 어느 반이 삐라를 많이 가지고 오는지 집계를 하며 반대항 경쟁까지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따금씩 삐라를 많이 가지고 온 친구들에게 표창장과 함께 공책과 같은 상품까지 시상을 하곤 했다. 친구 중에 하나가 지금의 일산 근처에서 우리 학교가 자리 잡고 있던 홍익대학교 근처까지 한 시간여에 걸쳐 통학을 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나마 사는 곳이 북한과 가까운 편이어서 그 친구가 삐라에 관련한 상은 도맡아서 받았다. 가끔은 삐라를 수북하니 가지고 와서 친구들에게 나누어주며 인심을 쓰기도 했다. 항상 그 친구에게 받기만 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서, 같은 동네에 사는 몇몇 친구들과 동네의 야산으로 삐라 사냥을 겸하여 놀러 가기도 했다.

 

      삐라라는 단어는 계산서, 전단, 포스터 등을 뜻하는 영어의 ‘bill’을 일본어로 읽은 ‘ぴら’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추측하건대 태평양전쟁 시기에 선전전(宣傳戰)이 치열하게 펼쳐지면서 익숙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곧바로 이념 다툼의 와중에서 일상적인 용어로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념경쟁의 와중에서 우리는  삐라하면 바로 공산당, 빨갱이가 연상되어 학교에 제출하기 전에 친구들끼리 돌려 보는 자체로도 가슴이 콩당거렸지만, 삐라사냥을 가듯이 한편으로 열심히 찾아 헤메는 이중성을 갖게 되었다.

 

      재일교포로 서울대학에 유학을 왔다가 간첩 혐의로 잡혀서 재판을 받는 서승, 서준식 형제의 사진이 실린 삐라가 내가 보았던 것 중에는 가장 충격적이었다. 중앙정보부에서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조사실의 석유를 끼얹고 자살을 기도했던 서승 씨가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재판정에 서 있는 모습의 사진은 당시까지 주종을 이루었던 북한으로의 귀순 권유 등과 같은 삐라와는 차원을 달리 하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런 사건이 있다는 것조차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른들에게 여쭈어 보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내가 삐라를 바로 학교에 내지 않고 찬찬히 읽었다는 증거가 될 것 같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있었다. 실제 벌어졌던 상황을 알기까지는 대학생활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당시의 삐라는 제한된 매체 사정에서 이루어진 넓은 의미로 광고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요즘으로 치면 ‘bill’이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그대로 전단, 카탈로그 광고와 가장 유사하다고 할 것이다. 전단이나 카탈로그는 재활용지 함으로 직행하지 않고, 사람들이 한 번 가볍게 훑어 보는 것만으로도 성공했다고 간주한다. 초등학교 시절의 삐라 수거는 어떻게 보면 가만히 두었으면 그냥 동네 야산에서 바람에 날리고 비에 젖다가 사그라질 것들을, 애 써 나서서 찾게 만들고, 그 와중에 내용까지 자연스럽게 읽도록 하였으니 그 지침의 아이러니는 냉전시대의 블랙 코미디의 한 장면으로 넘겨야 하는 것일까?

 

      얼마 전에 해당 업계의 절대적인 선두를 지키고 있는 광고주를 담당하고 있는 한 친구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고 찾아 왔다. ‘광고주에 건의하여 뿔뿔이 흩어져 있던 제품 몇 가지들을 묶어서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고, 거기에 맞는 이름, 즉 브랜드를 붙였습니다. 그런데 경쟁자들이 그 카테고리에 붙인 브랜드를 바로 자기네에도 가져다가 쓰는 것이에요. 광고주는 당연히 우리가 원조(元祖)라는 것을 주장하자고 하는데….’ 시장점유율이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쟁자들과 원조다툼이라는 진흙탕 싸움은 절대 벌이지 말라는 것이 당연히 답이었다. 괜히 이슈화 시켰을 때, 자신의 위상만 비슷한 등급으로 하향표준화하는 것이 되기 마련이다. 경쟁자들이 광고를 하는 방식이 또한 그렇게 도발적이지 않았다. 현재 만들어진 브랜드에서 하나 더 째고 들어가는, 말하자면 진일보한 신제품이나 특성을 가지고 리더쉽을 보여 주는 것이 선두기업으로서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광고주를 제대로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광고주의 초조함이나 조바심이 이해는 가나, 자신감과 포용력을 보여 주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이었다.

 

      물론 어느 때나 소규모 경쟁자의 도발에 무책이 상책으로 대처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 유명한 애비스(AVIS) 렌트카의 ‘우리는 2등입니다’ 캠페인에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그래, 너희는 2등이야’ 식으로 초기 강경대응했던 허츠(Hertz)와 같은 사례도 때에 따라 필요하다. 그러나 특히 애비스처럼 광고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의, 전체 시장을 흔들어 버릴 정도의 잠재력을 가진 아이디어나 물량공세가 아닐 경우는 자신있게 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인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의 국공내전(國共內戰) 시절, 압도적인 병력과 화기를 지니고 있던 국민당 지역이나 군대에서는 공산당에서 뿌린 삐라를 신고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사람은 공산분자로 몰려서 즉결처형까지도 당하곤 했다. 반면에 공산당 지역에서는 국민당 측의 선전 삐라를 요즘 이면지 쓰듯이, 자신들의 서류용지나 학습용지로 썼다고 한다. 이념을 떠나 어느 쪽이 선전전을 제대로 효과적으로 펼치었는지는 이후의 역사가 이야기해 준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