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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웨이의 무작정 서울 체류기

프랭크 웨이의 무작정 서울 체류기

 

      프랭크 웨이(Frank Wei)는 나의 오랜 친구이다. 1997년에 삼성 브랜드전략을 하면서 처음 만났다. JWT라는 세계적인 광고회사에서 나와 같은 플래너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프랭크는 특히 정량 데이터를 수집하고 읽고 분석하는 데 뛰어났다. 삼성의 자료를 내가 주로 설명을 해주면서 해석하는데, 나 자신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방향에서 데이터를 분해하고, 추가 자료를 요청하여 나를 가장 애 먹인 친구였다. 그렇게 하다보니 그 때 그 일에 참여했던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그 미쳐 지낸 여름(That crazy summer)’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붙어서 함께 지냈고, 프로젝트를 중간 정리하면서 서울에 왔을 때 그와 다른 친구 하나가 굳이 따로 시간을 내어 우리 집에 까지 오기도 했다. 아마 그가 이름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중국계라는 것도 그렇게 우리가 가까이 지내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의 일이 상부에서 묘하게 돌아가서 프랭크와 나와의 연락은 1997년 9월말로 갑자기 뚝 끊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쩜 그렇게 꽉 막혀 있었을까 싶게, ‘그 미쳐 지낸 여름’을 함께 보낸 다른 친구들 몇몇은 1998년말부터 어쩌다가 연결이 되어 만나기 시작했는데, 프랭크와는 소식이 두절된 채로 있다 내가 정식으로 주재원 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후, 2000년초에야 우리 둘의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는 피터 김(Peter Kim)의 갑작스런 사망 후, 내가 문상(問喪)을 간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피터 김이 일하는 회사를 그만 둔 지 한참이 된 것으로 들었는데, 프랭크는 거의 가족처럼 조문객 안내를 도맡고 있었다. 서로 깜짝 놀라 바라보다가, 내 명함만을 주고 왔는데, 피터 김의 장례식 다음다음날 전화가 와서 만나게 되었다.

 

      프랭크는 피터 김과 함께 하던 회사를 그만 두고, 몇몇 컨설팅 회사를 다니다가 당시 자신의 조사회사를 차릴 준비를 모두 마치고 시간만을 따지고 있던 형편이었다. 우리는 옛날 얘기를 하면서 술을 마셨고, 이후로 띄엄띄엄 넉 달에 한 번 정도씩 서로 만났다. 가끔은 ‘그 미쳐 지낸 여름’을 함께 보낸 친구들도 서로 연락이 닿는 한 불러 모아 함께 만났는데, 그 멤버 중의 하나는 이미 프랭크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초여름 어느 토요일에는 그 부인과 우리 집 식구들 모두가 함께 차이나타운으로 딤섬을 먹으러 가서 가족들끼리 상견례-나야 그 부인과 97년부터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이이기는 했지만-를 가지고, 조용한 해변을 끼고 있는 코네티컷의 프랭크 집으로 가서 바베큐 파티를 한 번 갖자고 약속을 했으나 그 약속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우리 가족이 귀국을 하게 되었다. 귀국한 이후 뉴욕 근처로 출장을 가면 될 수 있는 한 시간을 짜내어 프랭크는 꼭 만나곤 했다.

 

      올해 여름 시카고에 한 달 가 있는 동안에, 프랭크의 강력한 요청도 있고 해서 주말을 이용하여 뉴욕으로 한 차례 가려 했으나 여의치가 않았다. 서울로 돌아와서까지 미안한 마음을 앙금처럼 가지고 있던 9월초에 프랭크가 갑자기 메일에 쓴 것을 그대로 옮기면, ‘East에 가니, 그 곳에서 보자’는 뜬금 없는 메시지가 날아왔다.  대충 동아시아 쪽으로 온다는 얘기로 알아 듣고, 일정이 확정되면 알려 달라고 했더니, 자신이 홍콩으로 출장을 갈 예정이라고 거기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 왔다. 미국 애들이 나라가 워낙 넓기도 하고, 글로벌 감각이 워낙 떨어지다 보니 이런 식으로 생각을 곧잘 한다. 아시아는 한 나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광동 지역의 중국인으로서-내 생각에는 둥글 넙적한 얼굴형이나 외모에서 북부 중국에서 내려 온 객가(客家) 출신이 아닌가 싶다-, 프랭크까지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약간 실망스럽다. 아니면 내 자신이 서울에서 홍콩으로 날아 오는 수고를, 자신을 위해서라면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프랭크에게 홍콩으로 가는 길에 서울에 들렸다 가라고 하자, 그도 좋아하면서 10월 3일 주가 어떠한지 물어와 괜찮다고 하자, 10월 3일 일요일 저녁에 도착해  8일 아침에 출발하는 것으로 한 주를 꽉 채운 일정을 보내 왔다.

 

      일주일이라는 비교적 긴 체류 일정을 잡아, 혹시 만날 사람이나 다른 약속이 있는지 물었더니, 전혀 없단다. 오로지 나 하나를 믿고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항상 그렇지만, 일은 한꺼번에 밀려 온다고 항상 10월이 가장 바쁘기는 하지만, 이번 10월은 이제까지 내가 겪은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상황임을 확실하게 예고해 주고 있는데, 프랭크가 그 와중에 오게 된 것이었다. 시간을 어떻게 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가까운 곳에 묶도록 해야겠다는 예감이 들어 숙박비가 조금 더 비싸기는 하지만 강남의 호텔에서 신라호텔로 그의 숙소 예약을 바꾸도록 했다.

 

      도착을 저녁에 해서, 첫날은 자연스럽게 쉬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둘째 날은 다행스럽게 월요일이지만 개천절 휴일이라 아침에 호텔로 찾아가서 브런치를 함께 먹으며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대략적인 일주일 간의 계획을 잡았다. 저녁이야 아무리 바빠도 나의 시간을 어떻게 짜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낮 시간을 메워 주는 것이 큰 일이었다. 수요일 우리 신입사원들에 대한 강의를 부탁하며, 화요일에 그것을 준비하도록 했고, 목요일에는 우연히 알게 된 삼성물산 모 제품의 브랜드 매니저인 일본계 미국인과의 회의를 주선했다. 사무실이 분당에 있으니 하루를 꼬박 잡아 먹을 것이라는 못된 기대감을 가지고.

 

      개천절 아침 브런치를 먹고, 궁궐이 보고 싶다고 해서 ‘비원’으로 데려 갔다. 가는 도중에 청계천을 지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청계천의 역사를 차분히 그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얘기해 주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차가 다닐 수가 없어서 을지로 5가에서부터 비원까지 걸어갔다. 다리가 피곤하긴 했지만, 나도 근 십 년 만에 와 본 비원은 기대 이상이었다. 특히 부용정(芙蓉亭) 있는 곳은 내가 전에 왔을 때는 개방이 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서울 시내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연꽃들이 노니는 듯한 호수와 그것을 바라보는 언덕 위의 나무들과 예전의 색채를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며 근대의 조형물들을 모두 물리치고 있었다. 우리 바로 뒤에서 초등학교 애들을 데리고 와서 자기 애들에게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쓰던 아주머니가 자기 친구에게 ‘이런 곳 바로 옆에서 현대 회장이 투신자살을 했다는 것이 믿겨져?’하고 물어 본 것이 이해가 간다. 비원에서 인사동까지 다시 걸어와서 기념품 살만한 것을 구경하다가 사지는 않고 아픈 다리를 쉬러, 내가 2주 전에 왔던 토속주점으로 들어가 해물파전과 함께 막걸리를 한 동이 했다. 프랭크는 매운 한국 음식을 아주 좋아하나, 막걸리에는 그다지 땡기지 않는 눈치였다. 이어 우리는 잠시 서점에 들렸다가 우리 집으로 함께 와서 영어도 예전같이 되지 않아 수줍기만 한 우리 애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과일과 차를 나누고 헤어졌다.

 

      화요일의 우리가 합의한 프랭크의 계획은 수요일 우리 신입사원들 강의안을 만들고, 인사동에 들러 전 날 봐 두었던 미국의 가족들 선물을 사는 것이었다. 프랭크 혼자 대충 계획대로 진행을 한 것 같다. 수요일 아침 회사에서 만나 신입사원 교육에 대한 주의를 주었다. ‘업무 얘기, 즉 조사 얘기는 최소로 줄이고 재미 위주로, 외국의 광고 회사나 거기서 일하는 애들은 개인적으로 어떤 애들인지, 소프트한 얘기로 꾸밀 것’. 교육을 끝내고 내려온 프랭크의 얼굴이 어두웠다. 강의를 제대로 못한 것 같다며 얼버무리는데, 조사했던 이야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조사모델 등으로 특히 정량적인 얘기를 첫 부분에 집중적으로 하다보니 강의의 열기가 내내 만족스럽지 못한 것 같았다. 어쨌든 오전은 보냈고, 제일기획의 후배 하나를 불러서 셋이 얘기를 하며 점심 식사를 했는데, 고맙게도 후배가 프랭크에게 조사 얘기를 좀 들어야 될 것 같다며 그를 자기 사무실로 끌고 갔다. 제발 여유있게 오래 얘기하라며, 등 두드리며 보냈다. 프랭크에게는 저녁 7시 30분쯤 만나서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오후 시간에는 외부의 모임이 있어서 나갔다가, 6시쯤 들어와 몇몇 친구와 함께 코 앞에 닥친 일을 하는데 9시가 넘어서야 겨우 끝내고 신라호텔로 향했다. 중간중간 다음 날 프랭크와 만나기로 한 물산의 일본계 미국인 여자 친구가 회의를 제일기획에서 하고 싶다고 회의실 예약을 부탁해 시간을 뺏기도 했다가 결국 예정대로 분당에서 회의를 하기로 하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그 시간에 프랭크가 그렇게 먹고 싶어했던 돼지족발을 당연히 소주를 곁들여 사주고, 함께 강남의 주로 60~70년대 노래를 LP로 틀어 주는 단골 바에 가서 위스키를 먹다가 두 시 가까이 되어서 호텔로 보냈다.

 

      목요일 아침 프랭크가 힘겹게 전화를 했다. 머리가 아프고 숙취는 심하지만 물산 회의가 오후로 잡혀서 다행이고, 준비는 잘 할 수 있겠다는 요지의 전화였다. 그리고 물산 친구에게 전화가 바로 왔다. 프랭크와의 회의를 마친 후 둘이 서울로 올라올 터이니 저녁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금요일 마감에 맞추는 일이 있어서 시간이 없기는 하였지만 응락을 하고 나름대로 소위 진도를 빼기 시작했지만, 밤을 새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프랭크의 얘기대로 물산 회의는 생각보다 진행이 잘 된 것 같았다. 그 둘이 분당에서 올라오는 사이에 2004년 뉴욕에 함께 출장을 가서 프랭크를 만난 적이 있는 후배가 생각나서 그 친구를 저녁 자리에 합류하도록 했다. 아무래도 내가 덜 떠들어도 될 것 같으니, 밤을 샐 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힘을 아껴야 할 터였다. 저녁 자리는 마지막 순간에 초빙한 후배와 와인 두 병에 힘 입어 부드럽고 재미있게 모두가 만족스런 즐거운 자리가 되었다. 프랭크가 다음 날 DMZ관광을 하루 종일 한다고 해서 더욱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게다가 다음 날 저녁은 뒤늦게 97년에 나와 함께 프랭크와 깊은 인연을 가졌던 친구가 생각이 나서 그 친구와 함께 하도록 하였으니, 더더욱 홀가분했다. 9시 언저리에 자리를 접고, 물산 친구와 프랭크를 보내고 나니, 후배가 근래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함께 하지 못했다고 붙잡아 한 시간 정도 다른 후배 몇몇까지 어울려 자리를 함께 했다. 결국 10시가 한참 지나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생각보다 다른 친구들이 일을 잘 진행시켜 2시경에는 퇴근할 수 있었다.

 

      금요일은 처리할 일의 건수가 무척 많았다. 당장 올려야 하는 발표 원고가 하나 있어 거기에만 온 신경을 집중해도 힘들 터인데, 굵직한 일들이 연이어 있어서 몸을 몇 개로 쪼개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대부분 다음 주로 미루며 일을 끝내고, 오래 전부터 예정된 본부 단합 행사를 하며 맥주잔을 기울이다가 프랭크 생각이 났다. 다른 친구가 호텔에 와서 전화하기를 기다리고 있단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동안 신경 많이 써주고, 시간을 내 주어 고맙다고 해서 10시경에 합류하겠다고 얘기를 했지만, 프랭크가 보다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부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있다 보니, 다음 날 아침에 송별전화조차 하지 못했다. 끝이 흐지부지 된 것 같아서 못내 아쉽지만, 우리의 착한 프랭크는 충분히 이해를 해주리라 생각하고 기대한다.

 

      아마 곧 비슷하게 내가 또 뉴욕에 가서 프랭크의 신세를 질 터이고, 프랭크가 바쁜 일정을 짜내면서도 바쁘지 않은 척하며 돌보아 줄 것이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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