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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맥아더 동상이 상징하는 것

인천의 맥아더 동상이 상징하는 것

 

      기억할 수도 없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 손에 이끌려 갔을 수도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인천과 나의 첫 조우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경기도 내에서 인천과는 대각선으로 완전히 반대 쪽에 자리 잡은 작은 읍소재지에서 학교를 다니던 70년대 초였다. 당시 대통령 말씀에 따라, 각 초등학교마다 3학년부터 ‘자유교양’이란 이상한 이름 아래 아주 타율적으로 문교부에서 지정한 몇 권의 책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한 시험을 보는 것에 각 학교가 목숨을 걸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국가 지상주의에 불타는 국민을 만들기 위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것보다 약간 진일보한 형태의 교양이란 포장을 씌운 일제시대 교육칙어를 외우고, 천황의 계보를 외우는 것과 별다를 바 없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친구들이 특별활동 ‘자유교양부’라는 명목으로 선발되어 어린이용으로 풀어 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김유신 장군전”과 같은 300 페이지에 약간 못 미쳤던 책 서너 권을 처음 2~3주간은 방과 후에 남아서, 다음 2~3주는 점심 시간 후의 오후 시간 내내, 그리고 이어지는 3주 정도는 아예 수업을 전폐하고 아침 학교에 나오면서부터 통금 직전까지 그 책들만 읽다가, 흡사 과거의 초시 치르듯이 군내의 각 초등학교끼리 경쟁하는 대회에 나갔었다. 학교 대항전 형식으로 대회가 치러져 각 학교마다 교기를 앞세우고 선수단이 올림픽 선수단 입장 하듯이 줄지어 대회가 열리는 학교의 운동장을 열 지어 본부석에 경례를 하면서 들어 갔고, 각 학교 선수단의 입장이 끝나면 주최 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교육감 혹은 어떤 때는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이 있다고 알려진 대회이니만큼 군수 어르신까지 나와서 격려의 말씀을 했고, 우리는 열중쉬어 자세와 경례를 반복하며, 약간의 긴장과 지루함이 엇갈리는 것을 참으며 서 있었다.

 

      군 대회에서 입상을 하면 소년체전 입상한 것처럼 학교로 돌아와 조회 시간에 단상에 올라가, 똑 같은 상을 교장 선생님께 다시 받았고, 도 대회에 나갈 자격이 주어졌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군 대회에서 1등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입상을 해서 3학년 때 비록 입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수원에서 열린 도 대회에 진출을 했고, 4학년 때는 더 멀리 인천으로 대회에 참가하러 갔다. 수원이나 인천과 같은 대도시는 어린 나 뿐만 아니라 동네 어른들에게도 너무나 큰 대도시였고, 그런 곳의 아이들과 겨루어 입상을 한다는 것은 잔뜩 주눅이 든 우리들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저 기껏해야 툭하면 올라가던 읍 경계선에 위치한 산자락으로 소풍 가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대처로 선생님의 인솔 아래 선택 받아서 간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울 따름이었다.

 

      어떤 경로를 따라 인천에 닿은 지는 모르겠지만 하루가 꼬박 걸려 도착한 후, 숙소인 소박한 여관으로 들어 갔고, 익숙하지 않은 장거리 여행에 지친 어린 몸은 다음 날의 대회에 맞추어 몸 상태를 조절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도 없이 잠에 빠져 들었다. 당시 인천의 도 대회는 사립 명문이라는 신흥초등학교에서 열렸다. 군 대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학교 고적대가 선수단이 입장하기 전에 고적 소리 높이 올리며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고, 각 군의 대표단은 계속 울리는 북소리에 어색한 발걸음을 허둥지둥 옮기기에 바빴다. 시험을 어떻게 치뤘는 지의 기억은 별로 없고, 그저 지긋지긋한 강요된 독서가 끝났다는 사실이 반갑고 홀가분할 따름이었다. 오후 일찍 시험이 끝난 후 찾아간 곳이 바로 자유공원이었고, 우리는 의례껏 그러는 냥 맥아더 장군의 동상 앞에서 3, 4학년들은 올망졸망 앞 줄에 앉고, 고학년들은 뒷줄에 서고, 선생님께서는 한 켠에 뒷짐을 쥐고 서신 전형적인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 동네 중국 음식점과는 사뭇 다른 양식에, 규모도 훨씬 큰 중국식 지붕이 길 한 가운데로 삐쭉 나온 약간 색 바랜 중국식 건물들 몇 채도 보았다.

 

      이후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서울에서 다니며 친구들과 어울려 인천에 몇 차례 갔는데, 자유공원에는 딱 한 차례 갔던 것 같다. 동네는 더욱 쇠락한 느낌을 주었고, 맥아더 동상은 피식 웃으며 힐끗 보고는 지나쳤다. 한국전 때의 맥아더를 영웅, 그야말로 일본식으로 군신(軍神)과 같은 모습으로 그린 한국에서 나온 한국전쟁 기록들을 감동적으로 보았고, 그 여운이 남아 있는 때였지만, 어린 시절 대처 인천, 약간 색이 바래기는 했지만 바다 건너 이국인 중국의 화려함, 그 너머의 ‘꿈의 나라’ 미국과 그 힘을 상징하던 맥아더로 받아들이기에는 동상이 서 있는 위치와 주변 환경이 지극히 어울리지 않았고, 내 자신의 세계도 넓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각각 10년 간의 간격을 두고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를 방문했다. 웨스트포인트에서의 맥아더는 아직도 전설적인 존재이다. 웨스트포인트를 소개하는 비디오에서는 웨스트포인트 생도들에게 했다는, 맥아더 생전의 마지막 연설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박물관과 도처의 건물들의 소개문에서도 생도 시절의 맥아더를 엿볼 수 있는 구절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런 곳곳에 심어져 살아 숨쉬는 듯한 맥아더 전설에 비하면, 중심부에 서 있는 노장군 맥아더의 동상은 오히려 초라한 느낌을 준다. 아직도 깨지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는 생도 맥아더와 지나친 선전술로 본체보다 과대포장 되어버린 말년의 맥아더의 간극을 상징한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그 간극을 주변 세팅과 어울리지 않고, 그에 따라 부정적인 면이 눈에 두드러지는 인천의 맥아더 동상을 옮겨서 설치함으로써 메꾸었으면 좋겠다. 말년의 맥아더가 이룬 업적을 웨스트포인트를 찾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 군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을 되찾아주고, 웨스트포인트의 위대함을, 찬란했던 미군의 모습을 보여 주는 실체로 활용하는 것이 미국에 훨씬 좋을 것 같다. 한국에서 맥아더 동상으로 논란이 많다면 차라리 미국에 넘겨 주라는 소수 단선적인 보수 미국의원들의 말이 그들의 속뜻이야 그렇지 않지만 시의적절한 것 같다. 맥아더 동상을 보면서 국가주의 교육에 찌들었던 시절과 군사대국으로서의 미국만을 떠올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웨스트포인트라는, 외형상으로는 순수한 군사시설 속에서 순수 군인으로서 맥아더를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맥아더라는 브랜드를 제대로 표현하는 길이라 생각된다.

 

      사족으로 맥아더의 동상을 서울 동대문 부근에 있는 관우(關羽)의 사당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임진란에 맥아더처럼 종주국과 같은 자세로 참전한 이여송의 요구에 의하여 관우의 사당이 설립된 아픈 과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관우가 상징하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삼국지의 세계로 중국을 넘어선, 우리 나라 사람들까지도 공유하고 즐길 수 있는 것임에 반하여, 인천의 맥아더는 미국의 제국주의, 군사주의적인 속성과 냉전시대가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데서 큰 차이가 있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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