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죽어가던 `벤자민`을 살리고

“삶에 취해 비틀거릴 때가 있다./ 아스팔트 갈라진 틈에 구두 끝을 비비다가 /밖으로 고개 내어미는 풀꽃의/ 쥐어박고 싶을 만치 노란/ 콩알만한 꽃송이를 보거나/ 구두 끝에 꽃물 남기도 뭉개진 꽃의 허리가/ 천천히 다시 들릴 때.

봄날 아파트 뜰에서/ 같이 살며 잊고 지낸 문딩이 새를/ 문득 새로 만날 때/ 눈썹이 희고 목이 노란/(이름이 뭐드라, 얼굴 참 낯익은데) /그놈이 까딱 고개 숙여 인사를 한다./ 잠시 머릿속이 환해 비틀거린다.”

아스팔트 틈 사이로 비어져 나온 작은 풀꽃을 보며 문득 `삶에 취하는` 게 어디 시인뿐일른지요.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작은 아름다움, 이름없는 생명의 소중함과 질김을 발견할 때 그만 눈 앞이 어찔해집니다. 얼마 전 제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작은 소망도 자꾸 비껴간다는 생각에 지쳐 쓰러지려던 제게 “아직 살아 있잖아. 일어나, 빨리!” 하고 손을 내민 건 사무실에 놓인 `벤자민`이었습니다. 회사 기념일 선물이거나 누군가의 승진 기념 선물로 들어왔을, 키가 2m쯤 되는 벤자민 화분 2개중 하나지요.

처음 가져왔을 때 둘중 하나는 잎이 무성하고 수형도 예쁜 반면 다른 하나는 가지가 제멋대로 자란 탓인지 엉성한 게 영 못났었지요. 잘생긴 건 소파 옆, 시원찮은 건 내 자리 옆에 뒀는데 볼 때마다 소파 쪽 게 더 근사한 것같아 은근히 샘이 나곤 했습니다. “모른체 하고 저걸 내 옆에 놓는 건데. 괜히 눈치 보느라고…”. 슬쩍 바꿔놓을까 생각한 적도 여러번이었구요.

그런데 얼마 전 아침에 보니 창가쪽 잘생겼던 벤자민이 이상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잎이 누렇게 돼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나무를 흔들었더니 마른 잎이 후두둑 다 떨어지더군요. 화분의 흙을 파보니 물기라곤 없이 퍼석거렸습니다. 죽었나 싶어 가지를 몇 개 꺾어보니 뚝뚝 부러졌지요. 막 나오려다 그대로 죽은 듯 형체만 남은 새순도 손으로 비비자 그대로 부스러졌습니다.

옆에 있는 건 그래도 자주 들여다 보고 물도 주고 이파리가 시원찮다 싶으면 영양제도 줘 그런대로 잘 자라고 있었는데 겨우 2m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는 그 지경이 되도록 몰랐던 겁니다. “사람이 10명 가까이 있는 방에서 나무가 이렇게 되도록 뒀다니. 겨우 두 그루 있는 나무중 하나가 죽도록 한번 쳐다보지도 않았다니”라는 생각이 들자 저 자신이 끔찍해졌습니다.

가지만 앙상한 화분이 보기 흉해 사람을 시켜 내다 버리라고 할까 하던중 갑자기 마음 속에서 어쩌면 살아날 지도 모른다는 한줄기 희망이 일었습니다. 부랴부랴 전지가위를 찾아 마른 가지를 쳐낸 다음 물을 흠뻑 줬지요. 그리곤 출근하자마자, 점심먹고 와서, 퇴근하기 전에 등 하루 서너번 씩 들여다보면서 마른가지는 자르고 흙을 뒤적이면서 화분의 습기를 조절했습니다.

그러기를 사나흘, 가지 하나에 파르스름한 수액이 가득 오르는가 하더니 새순이 돋았습니다. 순간 그 황홀함이란. “아, 이게 살아나려다 보다” 싶자 반갑고 기쁜 마음에 두 눈이 커지면서 갑자기 맥박이 빨라졌지요. 다음날 아침 연하고 부드럽고 빛나는 연두색 새 잎이 나왔습니다. 텅빈 나목에 달랑 하나 달린 새 잎 하나.

오헨리작 `마지막 잎새`를 그리던 무명화가의 심정이 그랬을까요. “제말 살아만다오”라는 간절한 기도를 들었는지 일단 한 곳에서 솟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질새라 새순이 솟고 잎은 연두색에서 청록색으로 변해갔습니다. 투명하고 맑고 반짝거리는 잎을 볼 때마다 신기하고 기특했지요. 처음엔 “죽은 걸 갖다 버리지, 왜 저러나. 쯧쯧” 하는 눈길을 보내던 우리 방 식구들도 파릇한 잎이 솟자 탄성을 지르더군요. “거참 신기하네. 죽은 것같더니.”

그리곤 한결같이 마치 자기 일처럼 기쁘고 즐거워 했습니다. 각자 경우는 달랐겠지만 꺼져가던 생명의 소생을 보며 자꾸 희미해져 가던 마음속 희망을 다시 품은 듯도 했구요. 시간이 흐르면서 연두색 여리던 잎은 짙푸르고 튼튼해졌습니다. 나무도 제법 무성해졌지요.

그제서야 나무사전을 찾아 봤습니다. 아파트 베란다나 사무실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도대체 어떤 나무인지조차 몰랐다는 게 떠올랐던 까닭이었지요. `벤자민고무나무`라고도 한다기에 고무나무과인가 했더니 엉뚱하게도 쐐기풀목 뽕나무과에 속하더군요. 쌍떡잎식물이고, 원산지는 인도고, 열대지방에선 가로수로 많이 심으며 어디서나 잘 자라지만 너무 건조하거나 습기가 지나치면 잎이 떨어지기 쉽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죽은 것같던 벤자민의 회생은 온갖 걸 생각하게 했습니다. 사랑의 힘, 신경써주는 것과 무심코 방치하는 것의 차이,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은근과 끈기에 대한 보답, 정성과 실천의 효력, 교사의 관심에 따라 학생의 성적과 태도 모두 확연히 달라진다는 피그말리온효과까지.

남루하고 고단한 일상에서 “그래도 살아봐야겠다” 싶게 만드는 크고 거창한 것들이 아니라 이렇게 작고 미미한 일들입니다. 벤자민의 새 잎은 `여자라서` `나이 먹어서` `맏이라서` 겪고 견뎌야 하는 일들 때문에 자꾸 `징그러워지기만 하던` 삶에서 벗어나 `지난 건 모두 떨구고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겠다` 싶게 해줬습니다.

죽어서 툭툭 부러지던 가지가 있는 힘껏 물을 빨아올려 반짝이는 새 잎을 만들어내는 걸 보면서 현실의 배반 때문에 잔뜩 풀 죽은 채 상황 탓만 하던 데서 벗어나 “살아야겠다, 살 수 있겠다, 살고 싶다 “는 의욕과 희망, 세상에 대한 기대가 되살아난 것이지요.

다시 새해입니다. 갑신년 새해엔 모쪼록 `삶에 취해` 비틀거리는 날들, 작은 일들이 주는 기쁨에 머리와 마음 속 모두 불현듯 환해지는 날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목표나 집념 때문에 허덕이지 않되 그렇다고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고 짜증내고 그래서 자신을 방기하지도 않았으면 싶구요. 생각만하고 실천하지 않으면서 결과가 안생긴다고 투덜대는 일도 없었으면 합니다.

섣부른 기대를 앞세웠다 이뤄지지 않았다고 날 세우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고 노력했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합니다. “유토피아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실현되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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