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후에 초등학교 애들 세 명을 데리고, 전철을 갈아 타면서, 커다란 쇼핑몰 안에 자리 잡은 복합상영관으로 어린이 영화를 보러 갔다. 애들 많고 시끄러운데 나까지 들어가느니 차라리 밖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애들만 극장 안으로 들여보내고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한 시간 반 정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장소를 물색하는데, 딱히 마땅한 곳이 눈에 띄지 않았다. 건물 밖 벤치에 앉아 있자니 바람이 아직 찼고, 웬만한 음식점은 점심시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이기도 했겠지만, 제법 화창한 토요일 오후를 맞아 데이트 나온 커플이나 끼리끼리 모인 청소년들로 붐비고 있었다.




        겨우 찾은 곳이 쇼핑몰의 식당가 안에서 약간 비싼 축에 끼는 파스타 체인점 같은 곳이었다. 애들을 끌고 다니다 보니 갈증이 나서, 파스타 보다는 생맥주 모형이 거부할 수 없는 흡인력을 발휘했다. 종업원 수와 손님 수가 비슷할 정도로 한적한 음식점 한켠에 자리를 잡고, 생맥주와 함께 미안한 감이 들어 가장 값이 싸고 양도 작아 보이는 칠리 파스타를 시키고, 테이블 위에 책을 펼쳐 놓고 읽기 시작했다.




        전철 안에 들고 타고, 그렇게 시간을 죽이기에는 뒷주머니에 들어갈 정도 크기의 페이퍼백이 딱 어울리는데, 얼핏 보면 대학 교재만한 크기의 하드커버 책이 좀 어울리지 않기는 했지만, 워낙 재미있게 읽고 있던 책이었는지라 곧 책에 빠져 들었다.-참고로 “난징 대학살”이란 제목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간된 “The Rape of Nanking”이란 책으로 유명한 아이리스 장(Iris Chang)이 지은 "미국의 중국인(The Chinese in America)"이란 책을 들고 갔었다. 개인적으로 예전부터 우리의 재미교포를 비롯한 미국 내 이민자들, 특히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관심이 많아서, 중국인들의 미국 이주에 관한 책들을 몇 권 보았는데, 아이리스 장의 이 책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확실히 아이리스 장은 천부적인 글재주를 타고 난 것 같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맛깔 나게 다듬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런 글재주에 미모까지 겸비했던 그녀가 왜 우울증에 빠져 이 책을 낸 다음 해에 자살을 했어야 했는지?




        어쨌든 왼손으로는 책갈피를 지그시 잡고, 오른손으로는 포크를 쥐고 파스타를 빙빙 말아 한 입 입에 넣은 다음 맥주잔으로 손을 옮겨 한 모금 마시고, 한 동안 책만 읽다가 다시 오른손을 움직이는 그런 동작을 반복했다. 아주 가끔 힐끗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처음에는 엇박자처럼 들어갔지만, 교향악단의 심벌즈 한번씩 울리는 것 같은 리듬으로 동작이 나름대로의 틀에 맞추어져 돌아갔다. 그렇게 책에서 눈을 뗀 순간이 잠깐씩 책과 거리를 둔 다른 생각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애들이 싸우지 않고 영화를 잘보고 있을까’하는 걱정 많은 아버지로서의 기우로부터, 아이리스 장을 자살로까지 몰고 간 이유까지, 독서의 쉼표를 이어 주는 생각들이 약간씩 길이를 달리 하면서 이어졌다.




        그렇게 독서, 파스타, 맥주, 잡생각이 느슨한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돌아가면서, 그 잡생각들을 노트나 냅킨이나 테이블보나 아무데라도 끄적거리고 싶어졌다. 맥주 한 잔을 더 시키면서 볼펜과 메모지를 달라고 하려다가, 그렇지 않아도 이상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아르바이트 종업원들에게 더욱 이상하게 비출 것 같아 맥주만 시키고, 턱을 괴고 맥주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상황 자체가 상당히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맥주, 파스타, 책, 그리고 내게는 없었지만 가볍게 글을 끄적거릴 수 있는 메모지와 볼펜.




        무라까미 하루끼의 소설과 여행기에서 숱하게 보았던 바로 그 장면들이었다. 그의 소설을 보면 확실히 파스타 혹은 샌드위치 류의 가벼운 요리가 맥주와 어울리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하루끼의 소설에 등장하는 요리만 모아 놓은 요리책이 나오고, 그의 소설을 읽으면 맥주가 마시고 싶어진다는 사람들도 주위에서 몇 명을 보았다. 나는 그의 여행기를 소설보다 좋아하여, 여행지의 고유 음식을 먹으려 애쓰는 사이사이 부러 샌드위치나 간단한 파스타와 함께 맥주를 마실 시간을 짜내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여행기를 정리하는 그의 모습이 소설 속에 녹아 있는 맥주와 요리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다.




        잠재의식 속에 하루끼의 그런 모습이 영향을 미쳤을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토요일 오후 내가 혼자 파스타와 함께 맥주를 마신 것은 하루끼와는 아무 상관없이, 위에서 쓴 것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그저 목이 말랐고, 제일 값싸고 양이 적은 음식을 시켰을 따름이었다. 누군가가 그런 나를 보고 ‘하루끼 흉내 내려 애를 쓴다’고 얘기한다면 손해 본 것은 없어도 억울한 노릇이다.




        이런 억울한 사정이 일을 하면서 가끔 일어난다. 우리나라 광고계에서 불미스런 화제로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것이 표절시비이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겠지, 모르겠지 하면서 대놓고 베끼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자신은 본 적도 없는 광고물을 베꼈다고 사람들이 윽박을 지르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근 10년 전에 간단하게 브랜드 가치를 계산하는 공식을 몇몇 친구들과 힘겹게 만들었는데, 직후에 거의 같은 형태의 공식을 주제로 이미 논문이 발표되어 있는 것을 보고 허탈해 한 적이 있었다. 그 공식으로만 얘기하면, 우리 쪽의 문제가 크기는 하다. 관련된 논문에 대한 사전조사가 충분치 않아서, 어쨌든 쉽게 할 수 있는 것을 헛수고까지는 안가도 비효율적으로 일을 했다.



        비슷한 광고물을 내놓은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전조사가 부족한 부분은 혼이 나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무조건 베꼈다고 몰아치기 전에 상식적, 논리적으로 접근을 해서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경우로 받아들여 주는 여유도 가끔은 발휘해 주었으면 한다. 그런 여유 있는 관용 위에서 한 단계 더 뛰어 넘는 광고물과 공식을 만들어내도록 유도하고 촉구하는 것이 결과물의 수준을 높이는 데나,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효과적이다. 그런 방법이 아이리스 장이 동일한 자료와 사실을 가지고 훨씬 마음에 와 닿는 글을 쓰듯이, 거의 같은 기술과 특성을 지닌 제품들 가운데 눈에 틔면서, 고객들을 끌어당기는 실질적인 힘을 가지는  광고물을 만들어내는 길이 될 것이다.
2009년 10월부터 현대기아차그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노션월드와이드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임하고 있음.
역사 및 사회의 제반 모습들을 브랜드적으로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고, 그에 관련한 저서 두 권이 있다. '모든 것은 브랜드로 통한다(사회평론,2002)', '브랜드 마인드(사회평론,2004)'. 학부에서는 중국사를 전공했고, 삼성전자 홍보실을 거쳐,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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