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고전학습만큼이나 소중한 죽음교육

“형님 형님 사촌 형님 시집살이 어뗍뎁까? 이애 이애 그 말 마라 시집살이 개집살이. 앞밭에는 당추 심고 뒷밭에는 고추 심어, 고추 당추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맵더라.”(경상북도 민요 중)오죽하면 이렇게 노래했을까? 시집살이 서러웠다. 울고 싶어도 마음껏 울 수 없었다. ‘외나무다리’보다 어려운 시아버지, ‘푸르른 대나무 잎보다 푸른’ 시어머니 앞에서 울었다가는 된똥 싼다. ‘울었던가 말았던가 베겟머리 소이 질’ 무렵, 동네 상(喪)이 났다. 그러면 버선발로 쫒아갔다. 꺼이꺼이 울었다. ‘귀먹어서 삼 년이요 눈 어두워 삼 년이요, 말 못 해서 삼 년이요 석 삼 년’의 눈물을 다 쏟아냈다. ‘배꽃 같던 하얀 얼굴이 호박꽃이 되고 삼단 같던 머리가 비사리춤이 다되고 백옥 같던 손길이 오리발이 된 것’ 서러워 울었다.그렇게 해서 내 ‘슬픔’이 치유되고 나면 남의 ‘아픔’이 보였다. 그제야 물었다. ‘야, 야, 누구 죽었냐?’ 오늘날 심리학에서 말하는 집단적 비탄치유였다. 이처럼 동네의 상(喪)과 곡(哭)은 힐링캠프로 기능했다.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아버지의 가슴 찢는 눈물을 보았다. 따라 울었다. 죽음이 무서웠다. 슬픔을 학습했다. 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두 눈 뜨고 배웠다. 거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와서 할아버지를 추억한다. 인생 뒷 담화는 휴먼드라마였다. 할아버지가 그런 분이었다니…. 어느새 영웅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어깨가 절로 으쓱한다. 그런 할아버지를 위한 잔치란다.가난하고 팍팍하던 삶에 윤기가 돈다. 어디에 숨어 있었던지 모를 먹거리들이 튀어 나온다. 소원했던 사람들도 다 하나가 된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어깨를 토닥인다. 풀 죽어 있던 강아지들도 마당을 뛰놀며 덩달아 춤을 춘다. 신바람이 난다. 상은 이미 축제의 한 마당이 되어 있다.이 아름답던 죽음의 추억은 도시화 되고 장례식장이 늘면서 사라졌다. 모든 것은 기계화되었다. 상두꾼들의 “어엄 어엄 어나리 넘차 어화엄” 두 장단의 뒷소리에 따르는 “어넘 어넘 어나리넘차 어화넘 어넘 어넘 어나리넘차 어화넘 이제 가시면 어느때나 오실라요 오마는 날이나 알려주오 어넘 어넘 어나리넘차 어화넘 꽃도졌다 다시피고 잎도졌다 피건마는 어느시절에 오실라요 어넘 어넘 어나리넘차 어화엄” 구성진 노랫가락의 풍경은 더 이상 볼 수 없다.중년부인들의 항 우울제 복용이 늘고 청소년 자살이 세계 1위라고 한다. 슬픔 앞에서도 꿋꿋하던 가장들의 한숨소리 깊어지고 있다. 이런 사회 시스템으로는 다이내믹 코리아는 없다.불타버린 숭례문을 복원하듯 죽음과 무덤을 찾아와야 한다. 이미 서구는 초등학생들부터 죽음학(Thanatology)에 기초한 죽음교육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성숙도 죽음을 기피하고 멀리둘 게 아니다. 입관체험을 하는 깜짝 이벤트 정도로는 안 된다. 인문학적 성찰이 있는 죽음, 삶과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깨우쳐야 한다. 몇 주 전, ‘방안이 왜 이렇게 어지럽혀졌냐?’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10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10대들의 그 촌스럽기 그지없는 ‘가벼움’을 막아낼 수 있다.고전학습만큼이나 소중히 여겨야 할 죽음, 거기 우리가 사는 길이 있다.

CHO(Chief Happiness Officer) 송길원은 행복프로듀서, 행복촌장, 행복전도사로 불린다. 고신대학과 동대학원, 고려대학교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아내 김향숙과 사이에 예찬과 예준 두 아들이 있다. 가정문화를 퍼트리는 문화게릴라로 불리는 그는 수도 없이 가정회복의 아이디어를 퍼트려 왔다.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