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인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태권도 시상식에서 한 여성이 눈물을 흘렸다. 감격이 아닌 서러움의 눈물이었다. 국기가 오르고 국가가 나오자 이 여성의 울음은 더욱 거세졌다. 그녀의 이름은 천스신, 대만의 올림픽 역사상 첫 금메달리스트였다.

 

SBS 뉴스 캡처


 

조국에 처음으로 금메달을 안긴 그녀가 그토록 서럽게 운 이유는 기묘한 시상식 때문이었다. 천스신은 대만 국기가 아닌 대만올림픽위원회기를 향해 경례했고, 국가가 아닌 IOC의 국기가를 들어야 했다. 자막에 나온 그녀의 국적은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나 대만(Taiwan)이 아닌 중국대만(Chinese Taipei)이었다.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국제무대에 대만과 같은 위치에 서는 것을 극구 꺼린 중국의 압력이었다. 대만은 국가가 아닌 중국의 성(省)이며, 타이완 섬을 점거하고 자치 중일 뿐이라는 것. 이것이 ‘하나의 중국’의 핵심이다. 1971년 중국이 UN에 가입하자 대만이 축출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UN 창립국 일원으로 상임이사국까지 올라갔던 대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UN으로부터 국가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장제스가 마오쩌둥에게 진 대가는 이렇게 참혹했다. 그리고 전혀 의외의 곳에서 한 소녀 역시 참혹하게 만들었고, 젊은 사장 박진영의 발목을 잡았다.

 

‘나?’


사진, BNT 뉴스


 

  1. 하나의 중국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그 예쁜 애 옆에 또 예쁜 애, 그리고 예쁜 애와 예쁜 애, 자꾸 예쁜 애. 데뷔 앨범을 5만장 이상 판매하며 걸그룹 역사상 최고의 스타트를 끊었던 복덩이 트와이스가 박진영의 발목을 잡은 주인공이었다. 데뷔 100여일 만이었다.

다국적 걸그룹의 뇌관이라면 역시 국적이었다. 하지만 뜻밖인 것은 이 그룹의 아킬레스건인 3명의 일본인 멤버가 아닌 유일한 대만인 멤버 쯔위에게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는 것.

이미 알고 있겠지만 발단은 쯔위가 지난해 11월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출연 당시 대만 국기를 흔드는 장면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중국에선 “쯔위가 대만의 독립을 부추긴다”며 비난이 봇물을 이뤘고, 쯔위의 소속사 JYP엔터테인먼트는 지난달 13일 공식입장을 통해 “중국을 적대시 하는 어떠한 발언과 행동도 하지 않았다”며 진화에 나섰다. 그녀의 중국 활동을 잠정 중단하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중국은 오로지 하나의 국가입니다.” 사진, 유튜브 캡처


 

그럼에도 파문이 가라앉지 않자 이틀 뒤인 15일 JYP는 문제의 동영상을 게재했다. 이 영상에서 쯔위는 초췌한 모습으로 사과문을 낭독했다. 17세 소녀의 입에서 “하나의 중국”과 “잘못을 반성하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선배이자 고용주인 박진영은 아예 홈페이지에 올린 사과문을 통해 “잘 가르치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하며 “모든 파트너들과 관련 사항을 합당하게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어떻게 가르쳐야 잘 가르친 것이고 합당한 처리는 또 무엇인지, 그는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을 할 때처럼 애매모호했다. 대만인 소녀에게 “조국을 부정하라”고 하는 것이 잘 가르치는 것이고, 그녀의 중국 활동을 중단시키는 것이 합당한 처리라는 것인지.

다만, 그는 우회적으로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했다. 쯔위는 중국인이라는 것. 데뷔 이래 줄곧 대만 출신이라고 홍보해 왔던 그녀의 공식 프로필에서 국적은 순식간에 중국대만(Chinese Taipei)으로 바뀌었다. 천스신처럼.

 

직구와 변화구를 잘 던진다면 ‘쫄보’여도 좋은 투수다. 사진, SBS 캡처


 

물론 어쩌면 쯔위가 중국 사람일 수도 있다.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규정한 헌법에 따르면 위대하신 령도자 김정은도 한국 사람이듯, 서울에 거주하는 행정고시 출신 공무원 백남진 씨가 평안남도지사이듯.

 

  1. 두 중국


 

그러나 한-중 FTA에 북한과 대만이 포함되는지 묻는다면 쯔위와 김정은의 국적은 너무도 분명해진다. 특히 대만 수출용 트와이스 앨범에 어디로부터 관세가 부과되는지는 아마도 박 사장님께서 잘 알고 계실 것이다.

대만은 바티칸을 제외하면 유라시아 대륙에 대사관을 한 군데도 두지 못했지만 대표부를 통해 사실상의 외교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농협은 한국령 북한에 보내는 쌀을 조달청이 아닌 외교기관 통일부의 승인을 얻는다. 대만이든 북한이든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명목상 국가인 셈이다.

이른바 ‘쯔위 사태’에 있어 JYP의 사과는 그래서 문제였다. 중국의 딴지로 예민해진 대만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마침 총통 선거를 하루 앞두고 있던 대만은 들고일어났다. 대만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던 차이잉원에 대한 젊은 층의 지지엔 기름이 부어졌다. 현지 연구원은 쯔위 사태가 차이잉원의 득표율을 1~2%P 올렸을 것이라 관측하기도 했다(차이잉원과 주리룬의 득표율 격차는 25.1%P로, 쯔위 효과는 상징적일 뿐 유의미한 수치는 아니다). 결국 당선된 차이잉원은 급기야 기자회견에서 “국민이 자국 국기를 흔드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며 “대만을 억압해선 안 된다”고 쯔위를 언급했다.

차기 총통의 이 같은 발언은 앞으로의 양안관계가 순탄하지 않을 것이란 예고이기도 했다. 잠자던 반중 감정은 이미 깨어나고 있었다. 대만도 ‘하나의 중국’을 외쳤다. 대륙은 수복하지 못한 땅이고, 공산당이 무력 점거 중일 뿐이라고. 쯔위가 청천백일기를 흔들던 바로 그 달, 중국과 대만이 분단 66년 만에 처음으로 정상회담을 갖고 봉합에 나선 지 불과 2개월 만이었다.

 

“나는 대만에서 온 것을 사과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JYP의 사과에 항의하는 대만인들. 사진, 온라인커뮤니티


 

중국의 반발을 고려한 대만 소녀의 사과가 오히려 대만을 들끓게 했음에도 이번엔 JYP 차원의 성명 같은 수습은 없었다. 앞선 사과문을 통해 “정치적 해석을 경계한다”고 선을 그었으니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여기서 JYP의 손익계산서가 들통났다. 법인조차 세우지 않은 대만의 입맛에 맞추기보단 초대형 시장인 중국 앞에서 오체투지하자는 것. 한류의 노예를 자처한 셈이다. 물론 제물은 대만에서 온 쯔위였다. 아니, 중국에서 온 것으로 둔갑한 쯔위였다.

 

사진, BNT 뉴스


 
해명을 해야 할 땐 사과를 하고, 사과를 해야 할 땐 침묵을 지킨 JYP의 대처는 그래서 더욱 아쉬웠다. 설령 양안에 대한 몰이해였다면 이렇게 비열한 냄새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 멤버들이 한국에서 비난을 받는다면 트와이스의 영속을 위해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말하게 할 텐가. 물론 ‘쯔위 사태’의 시작부터 깊숙이 관여했음에도 모든 문제 해결을 JYP에 일임한 MBC가 가장 비겁한 방조자다.

한편 한국다문화센터는 쯔위에게 사과를 시킨 것이 인권 침해라며 JYP에 대한 진정서를 인권위에 제출했다. 이들에 따르면 JYP는 ‘중국 누리꾼의 과잉 반응에 굴복’했으며, ‘상업적 이익에 눈이 멀어 다문화 인권에 몰지각’했고, ‘국가의 이미지를 훼손’했다. 이에 대해 JYP는 강요된 사과가 아니었다고 반박했지만, 중요한 건 사과를 제안했는지 강요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쯔위가 사과의 필요를 느꼈는지 여부다. 어쨌든 박 사장의 OOH-AHH하지 못한 대응에 나는 불합격을 드리고 싶다. -집에서 허벅지를 긁으며 쯔위가 스치듯 나오는 설 특집 ‘아이돌 육상대회’를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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