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옛친구 혹은 학창시절의 동기가 고관대작 혹은 거부가 돼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인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그것은 진정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언제 보아도 철책가를 왔다갔다 하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독일작가 안톤 쉬낙(1892-1961)의 수필집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엔 실려있는 내용입니다. 두 가지 모두 지금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슬픈 일이 어디 그뿐일른지요. 올봄엔 유독 가슴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




어이없고 기막힌 대구 지하철 참사는 생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고, 전교조와의 갈등으로 돌아가신 교장선생님의 일은 쓰라리기 짝이 없습니다.뿐인가요. IMF사태로 온나라가 비탄에 빠졌던 게 엊그제인데 어느 새 까맣게 잊고 흥청거리다가 신용불량자 3백만명 시대라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처한 것도 서글프기만 합니다.




농구선수 허재가 소속된 원주 TG의 `2002-2003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우승은 이런 올봄에 모처럼 전해진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적어도 제겐 그랬습니다. 지난해 9위팀인 TG가 승승장구, 우승했다는 것도 듣기 괜찮았지만 올해 서른여덟살인 허재선수가 갈비뼈에 금이 갈 만큼 전력투구해 우승한 뒤 뛸 듯이 기뻐하는 광경은 한순간이나마 심란한 마음을 훌훌 털고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이번 우승 전에도 저는 허재(38,188㎝ 88㎏) 선수 팬이었습니다. 팬이라고 해봤자 허선수가 나오는 경기 중계를 보는 정도지만 그래도 그를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집니다.농구를 워낙 잘하기도 하지만 나이에 관계없이 자신을 잘 지켜내는 게 근사하기 때문입니다.




프로농구 원년인 97년 소속팀인 기아 코칭스태프와의 갈등으로 벤치에 앉아있던 시간이 많던 그는 다음해인 98년 손가락이 부러지고 눈두덩이 찢어지도록 뜀으로써 팀의 준우승에도 불구하고 MVP로 뽑힘으로써 `허재의 건재`를 보여 줬습니다.




그러고도 모자라 이번에 다시 TG를 우승고지에 올려놓은 것이지요. 우승한 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98년 형길이형(최형길부단장)이 정인교와 윌리포드를 내주는 출혈을 감수하면서 기아에서 나를 데리고 왔을 때 약속했다. `꼭 우승한다, 두고 보라고.` 우승하자마자 그 약속을 지켰다는 생각이 스치면서 울컥했다."




바로 이런 대목이 허선수에게 힘찬 박수를 보내게 하는 겁니다. 오기를 오기로 끝내지 않고 실천해내는 노력과 끈기는 아무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각오와 결심, 약속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시들해지게 마련입니다. 상황이 나쁘면 두 말할 것도 없지요. 그러다보면 핑계거리가 생기고 결국은 "뜻같지 않다"거나 "하늘이 안도와주니 어쩔 수 없지 뭐"식으로 주저앉기 십상입니다.




허선수의 경우 적당히 물러섰다고 해도 나무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간의 전적만 봐도 농구선수로서 실력을 발휘할 만큼 했고, TG의 여건상 우승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할 수 있다고 믿고 실제 해낸 겁니다.




허선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데다 아들의 천성을 발견하고 밀어준 아버지와 좋은 스승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재주도 갈고 닦지 않으면 발현될 수 없고, 아버지와 스승이 제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본인이 감당하지 않았으면 소용없었을 겁니다.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다는 걸 아는 사람의 경우 작은 홀대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수가 많습니다. 화려한 시절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한번 좌절하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것도 옛영예를 곱씹는데 시간과 마음을 빼앗겨 정작 자존심을 되찾는데 필요한 인내와 노력은 등한시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때마다 단순히 분노하고 돌아서는 게 아니라 무서운 노력으로 그것을 되찾곤 했습니다. 98년의 MVP 수상이나 이번 우승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허선수 덕에 기뻐진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는 이번에 29년 선수생활중 처음 모범선수상을 받았는데 솔직히 "받고 싶다"고 했답니다.받고 싶다고 주는 건 아니겠지만 상을 받을 만큼 태도를 바꿨다는 거지요. 이유도 분명합니다. “옛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조만간 지도자도 해야 할 텐데 계속 그런 이미지로 남긴 싫었다. 그래서 노력을 많이 했다."




잘나가던 젊은 시절,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하고 음주운전 사고를 내는 등 말썽께나 피운 그가 나이가 주는 짐과 무게를 인정하고 앞날을 걱정하는 것이지요. 그는 또 "예전엔 무서운 게 없었다.지금은 나이드는 게 좀 무섭다. 그래도 아직은 양복보다 유니폼이 좋으니 더 뛰고 싶다”고 했답니다.




저는 코트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허선수도 좋지만 이처럼 자신의 변화와 그에 따른 현실을 인정하는 허선수는 더 좋습니다. 정상의 자리를 누려본 사람이 어느 순간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닌 걸 인정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아 보입니다. 많은 이들이 한번 차지한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 버둥거리는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요.




과거 "내힘으로 우승시킬 수 없으면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겠다”던 허선수는 요즘 “뛰든 안뛰는 후배들과 호흡하는 것 자체가 즐겁다”며 주전이 아닌 식스맨으로도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음을 내비친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허선수가 올해 은퇴하지 않음으로써 내년에도 코트에서 그를 보게 됐습니다. TG가 내년에도 좋은 성적을 낼 지는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TG가 내년에 죽을 쑨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뭐라든 자신을 방기하지 않고 지켜내는데다, 나이 들어 개인이 아닌 팀의 힘을 믿고, 선수에서 지도자로 바뀌는데 필요한 요소를 준비할 줄도 아는,그야말로 `나이의 힘`을 보여주는 `허재`라는 선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아직은 충분히 살 만하다고 여겨지는 까닭입니다.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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