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곶감


 



이번 가을은 청명했습니다.
비는 알맞았고 바람 또한 좋았습니다. 똘감 한 접을 깎아 바람 잘 통하는 그늘에 두었더니 말랑말한 반건시가 되었습니다. 대꼬챙이에 꿰지도, 줄에 매달지도 않았는데 곰팡이도 슬지 않고 잘 만들어졌습니다.

곶감이 잘 되려면 말리는 기간 동안 비가 잦지 않아야 하고 바람이 불어 공기의 순환이 잘 되어야 하는데
올 가을은 이 조건을 다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연례행사처럼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 지방의 농가에서 만든 곶감을 주문하여 먹곤 하는데 올해는 주문량을 줄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제가 만든 곶감은 태깔도 맛도 고산곶감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제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이 뿌듯합니다. 입에 대지도 못할만큼 떫은 감이 발효의 과정을 거치니 이렇게 달콤하고 쫀득한 곶감으로 변한 사실이 신기합니다.

비린 어패류도, 맵고 퀴퀴할 뿐인 햇고추장도, 세상 짜고 텁텁한 햇된장도, 미생물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면 발효됩니다. 발효란 신통방통 오방통인 자연현상이자 과학입니다. 발효음식이 상차림의 기본이 되는 한국인의 밥상은 건겅지수 50점은 미리 따고 들어가는 셈이니 축복 받은 것이지요.

먹을거리가 귀하던 시절, 겨울나기 주전부리는 고구마와 감이었습니다.
서리가 내릴 무렵(상강)에 딴 감은 홍시와 감말랭이, 곶감 등으로 만들어집니다.
항아리에 짚을 켜켜로 깔고 앉힌 홍시는 익는 족족 꺼내다 먹지만, 공력이 많이 들어가는 곶감은 서늘한 광에 보관되다 손님 맞이용이나 제수로 쓰였으니 평상시엔 맛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명절이나 제삿날 상 거둘 때를 기다렸다가 잽싸게 한웅큼 챙겨야 곶감맛을 옹골지게 볼 수가 있었으니까요.

초등학교 4학년 되던 해, 앞마당과 뒤뜰에 도합 15 그루의 감나무가 있는 관사에 살았는데, 그 해 가을 어머니는 많은 양의 감을 깎아 말리셨습니다.
긴 대나무꼬치에 꿰어진 감은 가을 내내 그늘진 처마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의자 하나만 갖다 놓으면 바로 손에 닿는 높이라 달콤하게 변해가는 반건시를 매일 한줌씩 빼먹는 일은 방과후에 누리는 횡재였습니다.

그 해(1960년) 겨울, 안골 마을에 사는 친구의 집에 놀러 가보면 고구마가 방안 그득히 쌓여 있었습니다.
커더란 함지박에 금세 찐 고구마와 옹배기에 가득한 무동치미를 친척들과 나누어 먹는 모습은 경이로웠습니다. 그게 부러워 저는 틈만 나면 어머니 몰래 마실을 가곤 했습니다. 달랑 핵가족에 떠똘이 신세를 면치 못한 저희 가족의 삶과는 비교가 안 되게 행복해 보였으니까요.

학교가 파해 집에 오면 저는 청마루에 가득 쌓인 전래동화집이나 외국 동화집을 읽는 게 일과였습니다.
햇님과 달님, 소공녀, 소공자, 거지왕자, 핑켈의 모험, 헨젤과 그레텔 등이 당시에 읽었던 동화들입니다.
저는 어슷비슷한 남의 나라 동화 속의 박제된 얘기보다 마을에 사는 친구들의 스토리텔링이 훨씬 생생하고 재미 있었습니다. 아이같지 않게 입담이 구수한 친구가 제 뒺자리에 앉았었는데 쉬는 시간만 되면, 얘기보따리를 풀어 놓았습니다. 

아랫마을에 사는 김 씨 총각하고 윗마을에 사는 이 아무개 처녀가 눈이 맞아 밤마다 만났는데, 마을에 소문이 돌자  밤차를 타고 서울로 줄행랑을 쳤다.
한데 몇 년 후 돈 벌어 가정을 꾸리고 잘 산다는 소식에, ‘내눈에 흙 들어 오기 전에는 그얘 꼴 안 본다’던 고향의 부모와도 화해하고 뒤늦은 결혼식도 올리게 됐다.

돈이 없어 진학을 못하고 공장에 취직하여 서울로 간 우등생 금순이는, 못된 사내의 꼬임에 빠져 지금은 어디에 사는 지조차 모른다는 시골처녀의 슬픈 유전(流轉)까지…

최근 들어 불기 시작한 인문학과 힐링 바람은 올해도 차고 넘쳐 났습니다.
구청이나 도서관에서 행해지는 교양강좌 프로그램에 인문학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였습니다. 힐링이라는 단어 또한 일상에서 얼마나 많이 쓰이던지요. 
하고 보면 지금쯤엔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세상이 편안해지고, 삶이 보다 느슨해 있어야 할 터인데 과연 그런지요?  

우리의 김장문화가 유네스코의 인류 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이 반갑습니다.
심사위원으로부터 ‘한국인의 일상에서 세대를 거쳐 내려온 김장이 한국인들에게는 이웃간 나눔을 실천하는 연대감과 정체성, 소속감을 증대시켰다.’는 호평을 받았다는군요.
이렇듯 국제무대에서 인정 받은 우리의 김장문화가, 시장주의에 매몰돼 사라져가고 있는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는 촉매제로 작용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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