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실학의 향기

                      손암 선생이 흑산도의 사촌마을에 세운 서당-복성재. 흑산면사무소 제공>




                                                < 선비의 방- 안산의 성호 기념관에서>

                       <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 확성기에선 ‘동백아가씨’가 흘러 나온다>

                                                     



                                          <흑산의 기암괴석>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 선생과 그의 둘째 형 손암(巽庵) 정약전(1758-1816) 선생의 유배지를 기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여정은 서울을 떠나 다산의 생가가 있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 유적지로부터 시작해 수원화성, 안산의 성호, 부안의 반계, 흑산의 정암유적과 다산초당, 마지막으로 해남의 윤선도 고택 녹우당을 둘러보는 것이었습니다.

다산은 자신을 총애하던 정조가 서거(1800년)하자 세상의 기운이 심상치 않을 것임을 예견하고 고향인 능내리로 돌아와 여유당(與猶堂)이라 당호를 짓고 칩거했습니다.
여유당이라는 의미는 ‘겨울 시내를 건너듯 신중하게 하고(與兮 若冬涉川), 사방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猶兮 若畏四隣)는 뜻인데 노자의 글귀에서 빌어 온 것입니다. 하지만 시대는 고향에 내려 와 조용히 살고자 하는 다산을 그대로 놓아두질 않았고 서학에 연루되었다는 죄명을 씌워 유배형을 내렸습니다.

첫 유배지는 경상도의 장기였으나 이후 유배의 장소가 바뀌어 18년의 세월을 강진에서 보냈습니다.
필부는 시대를 원망하고 신세를 한탄하며 세월을 허송했겠지만, 다산은 이 시기를 실학의 저술에 몰두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임으로써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 500여 권의 여유당전서가 유배지에서 저술되었으니까요. 57세에 해배된 다산은 고향에 돌아와 75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여유당에 머물며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였습니다.

버스 두 대로 분승한 56 명의 실학기행 2013 일행은 7시 40분에 서울을 출발, 8시 30분에 남양주 유적지에 도착 생가와 묘소, 실학박물관을 둘러 본 후 다음 목적지인 수원의 화성으로 향했습니다.
실학은 관념적이고 이상에만 머무는 공리공론적 虛學을 지양하고 도탄에 빠진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여 부국강병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동한 학문입니다.
기행의 시작은 수은주가 34도를 오르내리는 가장 더운 날이었습니다.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고을의 수령이 일을 보는 관아가 있는 곳)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습니다.
화성은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 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번암 채재공의 총괄 아래 1794년 1월에 착공 하여 1796년 9월에 완공하였습니다.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고안 사용하여 무거운 석재를 옮기거나 쌓는 데에 이용하여 경비를 크게 줄일 수 있었습니다. 10년으로 잡았던 공기가 33개월로 단축될 수 있었던 연유는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급료를 충분히 지급했기 때문이라 하네요.

화성의 중심인 화성행궁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중에 크게 훼손되었으나 1970년대에 이르러 <화성성역의궤>에 의거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화성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지니고 있어 동양성곽의 백미로 꼽습니다. 이런 특징 때문에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습니다. 1801년에 발간된<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과 임금, 시공기계, 재료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어 이것도 2007년 7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작열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수원화성을 둘러 본 일행은 부근의 음식점에서 갈비탕으로 식사를 하고 안산의 성호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실학의 대가인 星湖 이익(1681-1763)은 형이 당쟁으로 희생되자 벼슬길을 단념하고 안산에 머물며 일생을 학문에 전념하였습니다. 성호라는 그의 호도 첨성리라는 지명에서 성(星)자를 따서 지은 것이라 합니다.
그는 실학의 비조로 불리는 반계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학문과 사상은 경학을 토대로 하고 있으나 經世實用의 면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익은 <성호사설> < 곽우록> <성호문집> 등의 저서를 남기고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의 학문은 안정복, 이가환, 이중환에게 계승되었으며 정약용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음 기행지는 전라북도 부안의 반계서당이었습니다.
반계(磻溪)는 학문의 목적을 국가의 부강과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원하는 현실적인 문제해결에 두고 저술에 몰두해 <반계수록>을 완성하였습니다. 실학의 1대조로 자리매김한 반계는 통치의 원리로 토지 공유제와 투표에 의한 인재발탁을 주장했습니다. 다산 연구소의 박석무 이사장께서는 그 해박한 경학적 지식과 다산을 향한 웅숭깊은 애정으로 버스 안에서도 유적지에서도 실학의 전파에 열정을 쏟으셨고 일행들은 학습하느라 피곤함도 잊었습니다.

부안을 향해 달리는 차창에는 빗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대지의 열기도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지요.
석양 무렵 부안의 우동리에 도착하여 반계 사적지를 향해 산길을 오르는데 비는 멈추었고 하늘엔 영롱한 무지개가 피어올라 일행들은 환호성을 울렸습니다. 돌담으로 에워쌓인 반계의 서당은 다시 지은 건물이나 관리의 소홀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선생이 살아계셨을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옛우물도 파란 이끼만이 가득했습니다.
산을 내려온 일행은 곰소의 밥집에서 젓갈정식으로 저녁을 먹고 밤이 이슥해서야 목포의 숙소에 도착하여 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비는 억수같이 퍼붓는데 흑산도로 들어가는 첫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비는 세차게 내렸지만 바람은 심하지 않아 뱃길은 순탄했으나 먼 바다로 나갔을 때엔 파도가 높아 규모가 있는 쾌속선이었음에도 많이 흔들렸습니다. 선장님은 이럴 때엔 의자에서 내려 와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이 멀미를 줄일 수 있고, 더 심하면 누워서 가는 것이 좋다 합니다. 8시에 목포항을 출발한 배가 2시간이 지나자 흑산도에 도착 하였습니다.

흑산도는 제가 대학시절부터 가보고 싶어했던 섬인데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후에야 그 땅을 밟게 되니 가슴 뭉클합니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지는데 대기중인 육로 관광버스에 올라 구불구불한 산등성이 길을 타고 상라산 정상에 오르니 비는 멈췄고, 운무 사이로 최서남단의 섬 흑산도의 절경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섬의 수려한 경관과 청정함에 반해 1달쯤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룸메이트에게 귀뜸했더니 자기도 같은 생각이라 하네요. 흑산도는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흑산에는 다른 섬에서 볼 수 없는 당제와 풍어제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홍어, 조기, 멸치, 전복, 우럭 등의 경매가 예리항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정약전이 머문 곳은 섬에서 가장 외딴 마을 사리(사촌)입니다. 그는 복성재(復性齋)라는 서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고 저술에 몰두하였습니다. 저서는 <논어난>2권, <역간>1권, <송정사의>, <자산어보>2권이 있는데 자산어보는 현산어보로도 일컫고 있지요.

손암은 흑산도를 매우 사랑하였는데 연해에 수산자원이 풍부하나 이름이 없는 것이 많고, 그것도 지역에 따라 이름이 다른 사실을 알고, 틈만 나면 바다를 관찰하고 어부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 155종의 수산물을 채집하여 명칭, 특성, 생태, 성어기, 분포상황 등을 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겼습니다.
이는 한국어족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됨은 물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자연과학서이기도 합니다.
병조좌랑을 지낸 손암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흑산도로 유배된지 15년 만에 (해배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절해고도 흑산섬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손암과 다산, 두 형제는 경학을 재해석하는 데 있어 탁월한 식견을 지녔던 분입니다. 초당과 흑산을 오가는 뱃길이 15 일이 걸리는 먼 길이었는데도 다산은 저술의 과정에서 의문스러운 대목이 있을 때마다 형님에게 물어(서신으로) 검증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두 분은 멀리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불운한 처지였지만 서로를 가련하게 여기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우애 깊은 형제였습니다.
이해득실을 따져 형제간에 반목하고 등을 돌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오늘의 세태를 볼 때, 두 형제의 도타운 우애와 선비로서의 삶은 만인이 본 받아야 할 태도 아니겠는지요.

점심을 마친 후, 2 시간 정도 실학강좌가 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기행에 참여한 분들의 자기소개도 있었는데 언론인, 선생님과 교수님들이 많았고 그외 다양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참여 했습니다. 직업은 서로 달랐지만 배우기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는 점은 공통이지 싶습니다. 해가 서산에 걸린 5시 경 궂은 날씨로 취소될까 우려했던 선상유람이 시작되었습니다. 달뜬 마음으로 배에 올랐더니 하늘은 맑게 개었고 파도도 잦아들었습니다. 2 시간여 동안 배의 갑판 위에 서서  흑산의 맑고 푸른 바다와 하늘과 나무들과 기암괴석의 아름다움에 빠져드니 마음 속 묵은 찌꺼기들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흑산의 대자연에 온전히 몰입되어 물아일여의 청복에 잠기니 이게 바로 힐링이다 싶습니다.

설레던 선상관광을 마치고 식당에 들어서니 그 유명한 흑산홍어(삭히지 않은 것)와 우럭, 광어회 등으로 차려진 저녁상이 나그네를 반깁니다. 삭힌 홍어의 암모니아 냄새에 적응하지 못해 삼합을 외면해 왔는데 날것 그대로의 홍어회에 동네 할머니들이 가용으로 담근 막걸리 한 잔을 들이키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싶습니다. 숙소에 들어오니 비는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고 흑산의 밤도 깊어 갑니다.

기행 마지막날의 일정은 강진의 다산초당과 백련사, 해남의 윤선도 고택 녹우당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퍼붓는 빗길 속에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에 올랐습니다.
다산초당은 초행이 아니라서 옛집에 찾아든 길손마냥 낯익고 반가웠습니다.
제가 초당을 처음 찾은 것이 대학 다닐 때였으니까요.

죄인의 몸으로 강진에 유배온 다산은 처음 읍내의 동문 밖에 있는 주막의 뒷방 사의재(四宜齋)와 고성사의 보은산방 등을 전전하면서 지냈고 나머지 10년은 윤씨 가문 제자의 도움을 받아 초당에서 살았습니다.
초당으로 옮긴 다산은 비로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지요. 다산은 후학을 양성하며 받은 수업료로 20 마지기의 논을 사들여 농사도 지었습니다. 후일 다산이 해배되어 고향으로 올라가면서 이 논은 제자들과  함께 만든 다신계에 기증한 바 있고 500여 권의 저술도 초당에서 집필하였습니다.
다산  당신에겐 유배가 형극의 길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습니다. 이를 입증하듯 2012 년에는 다산이 유네스코가 기념하는 세계인물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다산초당에는 동암, 서암, 천일각 등의 건물이 있으며 초당은 1957년에 복원됐고 나머지는 1970년대에 복원한 것입니다. 초당에서 산길을 따라 20여 분을 걸으면 백련사가 나옵니다. 다산은 이 절의 혜장선사와 깊이 교우하였는데 두 분은 늘 이 산길을 오고 가면서 차를 함께 나누고 학문도 교류하면서 우정을 돈독히 하였습니다.
백련사는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으로도 유명합니다.

한정식으로 유명한 강진의 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유년에 자주 먹었던 맛(조개)이 상에 올라 있어 기뻤습니다.
몇 해 전 여름 그 맛(조개)이 느닷없이 생각 나 노량진 수산시장을 찾았는데 비슷하게 생긴 것이 있어 반신반의 하면서 사가지고 와 데쳤지만 음식이 아니다 싶게 요상해서 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 상한 수입산이었을 것입니다.

고산(孤山) 윤선도(1587-1671)가 살았던 해남의 녹우당(綠雨糖)은 15세기 중엽에 지어진 고택입니다.
녹우당은 효종 임금이 사부였던 고산을 가까이 있게 하려고 수원에 지어주었던 집인데 해남으로 귀향하면서 수원집의 일부를 뜯어와 지은 사랑채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녹우당이라 부릅니다.

고택의 뒷산에 비자나무 숲이 있는데 비자나무 푸른 잎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린다 해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이 해남 윤씨 가문이 다산의 외가입니다. 다산은 유배지 가까운 곳에 외가가 있어 家傳의 서책을 열람하고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있었음은 불행 중 다행이라 여겨집니다.

실학의 자취를 따라 기행을 하고 나니 선비란 바로’ 학불염 교불권'(學不厭 敎不倦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을 실천하는 사람이라 여겨집니다.
세상이 날로날로 부박해지고 있는 이즈음입니다.
실학자이자 대개혁가였던 다산의 우국애민(憂國愛民) 정신을 공부하는 일은, 변화가 절실한 이 시대의 지도자들이 수행해야 할 아름다운 의무라 생각합니다. 기행하는 내내 무덥고 비가 내려 불편했지만, 내 생애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빛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