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내가 만든 하루


 


                                                   < 현충사-아산시 문화관광과 제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아산시 문화관광과 제공>

                                                              <공세리 성당-아산시 문화관광과 제공>

막바지 폭염의 기세가 당최 꺾일 줄을 모르는군요.
견디고 이겨내면서 지내고 있지만 지칩니다.
하기싫어 밀쳐 두었던 일을 꺼내 처리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한 잔의 시원한 음료는 순간이지만 더위를 싹 가시게 해 주지요.

더위를 잊게 해 주는 음료는 무엇이 있을까요.
냉커피, 차게 얼린 생수, 생과일 쥬스, 수많은 탄산음료…
쏟아져 나오는 시판 냉음료들은 진열대에 차고 넘칩니다.

밥알 동동 식혜 한 사발, 오미자 우린 물로 만든 오미자차, 매실액으로 만든 냉주스, 곶감이 들어가지 않은 수정과, 냉수에 탄 꿀물, 배숙, 콩물, 미숫가루…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몸에도 유익한 화채와 식혜가 몸의 열기를 식혀 주리라 생각합니다.
제철 과일을 저며 만든 화채, 잡곡을 찌고 볶아 만든 미숫가루, 엿기름물에 밥을 삭혀 만든 식혜 등을 장만해놓으면 여름나기가 수월합니다.

이열치열의 일환으로 집 가까이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묘소와 현충사 그리고 공세리성당을 순례하였습니다.
자고 새면 돈 계산, 반찬거리 걱정, 지나온 생애에 대한 회의 등으로 머릿속이 뒤법벅인 게 요즈음이었습니다. 어제는 이런 것 다 접어버리고 유적지 탐방길에 나섰습니다.
시티투어를 이용하니 해설과 함께 편안하게 목적지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가해진 박해와 치욕을 침묵으로 견디면서 오로지 무사로서의 忠을 실천하다 가신 이순신 장군의 순결한 영혼. 자신이 꿈꾸는 미래의 세상을 증거하다 죽임에 임한 사제들의 생애 속에 잠깐이나마 나를 머물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여 속진에 찌든 저를 성찰하고 싶었습니다.

탁 트인 시야에 잘 생긴 소나무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장군의 사당과 묘소는 누가 보아도 명당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잘 가꾸어져 있었습니다. 장군의 영정과 묘소 앞에 무릎 꿇고 2배를 올렸습니다.
장군은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을 설득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군율을 집행함에 있어서는 엄정했지만, 약자에 대한 연민의 정은 깊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인간은 아늑하고 풍성한 곳에서 다툼 없이 살고 싶다. 낯설고 적대적인 세계를 인간의 안쪽으로 귀순시켜서 그렇게 편입된 세계를 가지런히 유지하려는 인간의 꿈이 수천 년의 살육 속에서 오히려 처연하다.’ 김훈 선생님의 글귀도 떠오릅니다.

순교자의 추모비 앞에 핀 흰 백일홍나무 아래 섰을 때, 2층에 모셔진 순교자의 유해와 당시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 앞에 섰을 때엔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했습니다.
역사의 아픈 사건들을 추상하지 않는다면 공세리 성당은 수려함의 극치였습니다.
수령이 300백 년이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팽나무 그리고 무심한 듯 피어 있는 연보랏빛 상사화 꽃무릇까지.

이 염천에 사적지 탐방길에 나선 것은 진부한 일상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聖(das heilige)스러움을 찾고 싶은 내면의 욕구 때문이었습니다. 기이한 일은 종일 차 타다 걷다를 반복했고, 친구나 가족을 동반하지 않았는데도 피곤하거나 허전하지 않았습니다. 내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맑은 기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집에 돌아오니 해가 서산을 넘어 버렸는데도 엿기름물을 내리고 밥을 지어 식혜를 앉혀놓고 잠에 떨어졌지요. 언제  잠든 줄도 모르고 날이 밝았는데 밥솥을 열어보니 밥알이 잘 삭아 동동 떠올라 있네요.
몇 달 전부터 식혜를 만들어야지 하면서도 곧장 잊어먹고 지나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는데 사적지 순례를 하고 나니 습관적인 게으름이 싹 달아납니다.
당도도 알맞고 엿기름물의 농도도 적당해 금세 불을 켜고 끓이니 맛난 식혜가 완성됐습니다.

한데 깜박 한 게 있습니다.
밥알을 동동 띄울려면 밥알을 따로 건져 찬물에 헹구어 엷은 설탕물에 둬야 하는데 그만 깜빡하고 말았습니다.
겨울에 만들 때는 식혜를 맑게 만들기 위해 엿기름물 가라앉은 앙금을 미련 없이 버리는데, 여름 것이라 좀 걸죽한 물까지 넣어서 만들었더니 색은 검지만 맛은 그만입니다.
차게 식혀서 한 컵 마시니 더위는 저만치 달아납니다.

이제부터는 주어진 상황에 내가 끌려가는 피동적인 삶에서 벗어나 나의 하루를 기획하고 하루와 승부하는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자신의 생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사는 게 남아 있는 생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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