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천사와 악녀&왕자와 깡패

`천사와 악녀 왕자 깡패`만 등장시키면 틀림없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TV드라마엔 이런 공식이 생긴 듯합니다. 트렌디드라마라는 이름 아래 똑같은 구도의 연속극을 계속 내보내니까요. 처음엔 천사와 악녀 왕자의 삼각관계로 시작하더니 최근엔 그것만으론 극적인 효과가 떨어지는지 깡패를 보태고 거기에 `출생의 비밀`까지 포개넣고 있습니다.

스토리를 끌고 가는 방식도 대동소이합니다. 부잣집 아들로 대변되는 왕자(혹은 깡패)를 사이에 두고 악녀는 천사를 괴롭히고, 천사는 왕자와 깡패 모두의 조건없는 사랑 앞에 흔들리구요. 악녀의 술수는 혀를 찰 만큼 치밀하고 천사는 속절없이 당하고, 도중에 왕자는 진실을 알지 못해 방황하지만 깡패는 상황에 관계없이 천사의 주위를 맴돌고, 온갖 우여곡절 끝에 천사는 왕자의 도움으로 하루 아침에 모든 걸 거머쥐고…..

SBS `토마토’(1999), MBC ‘이브의 모든 것’(2000), SBS `수호천사`(2001)에서 천사와 악녀의 대결구도를 보여주던 드라마는 올들어 SBS `유리구두`와 `라이벌`로 이어지면서 깡패와 출생의 비밀이라는 또 다른 요소를 삽입합니다.

TV연속극이라는 게 재미와 아슬아슬함을 무기로 시청률을 올리고자 하는 만큼 유행공식을 만들어 대입시키는 것 자체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 공식에 나타나는 여성상이 너무 엉뚱하고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지요.

게다가 이들 드라마가 한결같이 `커리어우먼 성공담`을 표방하는 건 고소를 금치 못하게 합니다. 실제 이들 드라마는 다양한 직업의 여주인공을 내세우고 있습니다.`토마토`에선 구두디자이너`, `이브의 모든 것`에선 앵커, `수호천사`에선 카피라이터, `유리구두`에선 인터넷통신전문가, `라이벌`에선 골퍼를 등장시키는 게 그것이지요.

그러나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자신의 분야를 용감씩씩하게 개척하는, 건강한 커리어우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멉니다. `일과 사랑을 함께 쟁취하는 새로운 여성상을 그리겠다`는 제작의도와는 거꾸로 이들 드라마는 한결같이 `자아 실현 욕구가 강한 여성은 악녀고, 악녀는 어떤 남자의 사랑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모든 걸 잃는다`고 주장합니다.

뿐인가요. 여주인공은 너무 뻔한 악녀의 술수에 거듭거듭 넘어가고(여자는 그저 얼빵해야 한다는 걸 입증하려는 듯이), 그럼으로써 남자의 동정을 자아내고, 그 결과 사랑과 성공(왕자의 사랑을 얻는게 곧 성공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을 함께 얻어내는 승리자가 됩니다.

여주인공이 하는 일은 자기가 얼마나 착한 지를 과시하면서 걸핏 하면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엔 거의 없습니다(아, 물론 예쁘다는 대전제가 있긴 합니다). 그런데도 바로 무능한,그래서 남자를 필요로 하는 대목이 왕자와 깡패를 감동시켜 모든 걸 안겨주는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여자는 그저 예쁘고 착해야 남자의 사랑을 얻고, 남자의 사랑만 얻으면 그 직업에 도무지 소양이 없어도 발탁돼 요직을 맡고(이브의 모든 것), 취직이라고 해놓곤 걸핏하면 결근과 지각을 일삼아도 능력을 인정받고(유리구두), 갖가지 핑계로 번번이 약속을 어겨도 계속해서 기회가 주어지는(라이벌) 것일까요?

그렇다면 얼마 전 신문 사회면을 장식한 `캠퍼스, 왕언니 득세`라는 제목의 기사는 어떻게 된 일일까요? 기사의 내용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던 여성들이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 진학이나 고시 유학 공부 등을 위해 학교로 되돌아와 학과 사무실이나 동아리방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사엔 여자졸업생들이 왜 직장을 그만두는 지 구체적인 이유는 없이 그저 “만족할 수 없어서” 정도로 돼 있었습니다. `만족할 수 없는` 까닭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학교와는 달리 냉정하기만 한 직장생활에 쉽게 적응하기 어려웠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불평등이 존재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어려웠거나, 그야말로 취직해보니 전혀 적성에 맞지 않았거나 등등.

그야말로 상황이 나빠서일 수도 있고, 현실 인식이 약한 때문일 수도 있고, 남자와는 달리 `벌어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덜해서일 수도 있습니다(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한 건 직장생활이라는 게 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녹녹한 게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회란 어쩌다 한번 주어질 수는 있어도 놓치면 다시 잡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는 개인의 변명이나 핑계를 일일이 감안해 다시 기회를 줄 만큼 너그럽지 않습니다. 물론 `빽`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야 한결 낫겠지요. 똑같이 입사해도 좀더 좋은 부서에 배치받고, 고생은 덜하고 생색나는 일을 맡을 수도 있고 그 결과 남보다 빨리 승진할 수도 있고…..

그러나 “자리란 만들어주는 것까지는 다른사람이 해줄 수 있어도 지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몫이다” 또는 “왕자를 잡으면 `마님`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일에서의 성공까지 보장되는 건 아니다”라고 한다면 `너무 뭘 모르는 소리`에 불과한가요.

드라마는 물론 허구입니다. 당연히 내용도 조작된 것이고 그러니 현실성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트렌디 드라마는 스토리를 보는 게 아니라 등장 탤런트의 인물을 보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여성, 그것도 젊은 여성을 주시청자로 삼는 트렌디드라마가 “여자는 예쁘고 착하면 된다. 쓸데 없이 강한 자아나 높은 성취욕구를 지니면 곤란하다. 여자의 운명은 남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고 강조하는 건 가뜩이나 우리 사회에 만연된 루키즘(외모지상주의)을 더더욱 부추기는 것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국내의 TV드라마가 이렇게 흘러가는 것 자체가 `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천장`이 너무 높고 두꺼운 현실의 반영내지 그에 따른 여성들의 변명과 자기위안(여성이 직장생활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도태되도 그건 왕자를 만나지 못해서라는)을 대신하는 것이라는 `알쏭달쏭한` 주장도 있긴 합니다만…

아무튼 저는 푼수도 아니고, 악녀도 아니고, 천방지축 엽기적인 그녀도 아니고, 얼빵한 천사도 아닌 건강한 커리어우먼, 남자와 함께 살아가지만 일방적으로 사랑받고 도움받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의논하고 지켜봐주고 그럼으로써 시간을 두고 함께 성장해가는, 그런 여성의 모습을 우리 대중매체에서 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보통남자들도 `왕자도 깡패도 못되는(?) 보통남자 컴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으니까요.***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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