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봄에 캐서 말려 두었던 쑥을 삶아 쑥인절미를 만드셨습니다.
쑥 삶는 날, 밖에서 친구들과 얼음지치기를 하며 놀다 들어오면 집안 가득 퍼진 쑥향기가 얼마나 좋던지요. 인절미를 하기 위해 마련하는 콩고물 만들기도 재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떡집에다 주문전화 한 통화 하면 다 해결되지만 그 때는 모든 과정이 수작업이었습니다.
백태(메주콩)나 청태(겉과 속이 푸른콩)를 씻어 물기를 빼고 가마솥에 볶아 식힌 연후, 반으로 타서 손으로 비벼 껍질을 벗겨내고 키로 까불어 절구에 빻고 체로 쳐서 콩가루를 만들었지요.
인절미 만들 때 쓰고 남은 콩가루는 서늘한 곳에 두었다 주먹밥을 만들어 간식으로 주시기도 했습니다.

푹 불린 찹쌀(4kg)을 소쿠리에 건져 물기를 뺀 후 시루에 앉혀 찌다 거의 익을 무렵 삶은쑥(물기 뺀)을 얹고 소금물(물 1컵에 소금 2큰술)2컵을 고두밥 위에 고루 뿌리고 센 불에 푹 찐 다음 뜸을 들입니다. 고두밥이 잘 익었거든 절구에 넣고 떡메(공이)에 엷은 소금물을 적셔가며 밥알이 반질해질 때까지 찧습니다. 안반에 콩고물을 고루 편 다음 떡덩이를 얹고 떡 위에도 고물을 뿌려가며 편편하게 늘려 떡의 모양을 잡고 접시를 굴려 떡을 가른 다음, 도마 위에 놓고 알맞은 크기로 잘라 고물을 묻혀가며 모양을 만들어 널찍한 쟁반에 담습니다.

오래두고 먹을 것은 떡을 큰 덩이로 만들어 석작에 담아 서늘한 곳에 보관합니다.
설이 지나고 그득했던 주전부리가 떨어져갈 즈음 딱딱하게 굳은 인절미는 다시 찌거나 화롯불에 구워서 먹었는데 저는 구운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방 윗목에 놓인 무쇠화로에 삼바리를 얹고 그 위에 석쇠를 얹어 인절미를 구우면 겉이 노릇노릇해지면서 떡이 부풀어올라 말랑해지는데 이것을 조청에 찍어 먹으면 처음 만들었을 때 보다 더 맛이 있었습니다. 인절미를 꿀이나 조청에 찍어 한 입 베어물면, 입안에 감도는 쑥향과 쫀득한 식감에 홀려 겨울밤이 긴 줄도 모르고 지나가곤 했지요.

조청 만드는 일도 명절준비에서 빠지지 않는 과제였습니다.
늦가을에 길러 빻아둔 엿기름을  미지근한 물에 담가 바락바락 주물러 엿기름 속의 아밀라제가 다 빠져나오게 합니다.식혜 만들 때는 엿기름물을 가라앉혀 윗물만 사용하지만, 조청 만들 때는 엿기름물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맵쌀이나 찹쌀을 물에 불려 물기를 빼고 시루에 앉혀 고두밥을 쪄냅니다. 엿기름물에 고두밥을 붓고 이불을 뒤집어 씌워 따뜻한 아랫목에 7-10시간 정도 삭힙니다.

밥알이 삭아 위로 떠오르면 삼베자루에 넣고 짜서 찌꺼기를 거릅니다. 이 물을 센불에 조리는데 기포가 생기기 시작하면 불을 줄이고 주걱으로 계속 저어주며 밑이 눌지 않게 합니다. 엿기름물이 걸죽해져 찬물에 떨어뜨려 풀리지 않으면 조청이 다 만들어진 것입니다(3시간 정도). 엿물 끓일 때 생강즙을 넣어도 좋아요.
이렇게 만들어진 조청을 더 조리면(2시간 반 정도) 갱엿이 되고, 이것을 옹자배기에 담아 식혔다 늘리면  액상에 기포가 생겨 바삭한 흰엿이 만들어집니다. 만들어놓은 조청은 차게 보관하여 고추장 담글 때나 유과와 약과 정과 만들 때에 쓰였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옛음식(슬로푸드)은 몸에 이롭거니와 마음까지도 훈훈하게 가꾸어주는 명약이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음식 만드시는 어머니를 따라다니다 보면 힘든 어머니를 절로 돕게 되고 그 노고에 감사드리는 마음이 생기니, 그게 바로 속도 문화와 시장논리의 냉혹함에 맞서는 인문정신의 단초 아니겠는지요.

최근들어 '인문정신' '인문학' '인문주의' 같은 단어들이 부쩍 회자되고 있고, 그것을 시대정신으로 확산하려는 움직임들도 보이는데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신 중심이던 중세 유럽사회에서 인간 중심으로의 세상을 도모하기 위해 태동한 이 사조가 21세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 다시 강조되는 이유가 뭘까요.

먹을거리가 귀하던 시절, 부지런히 일만 하면 모두가 풍요로워진다는 일념으로 쌓아올린 경제성장의 그늘엔 두터운 하부구조가 형성되어 버렸습니다. 하여 세대간, 계층간의 골은 깊어졌고 사회는 삼분오열되었습니다. 지식의 지향점 또한 '써먹을 데'로만 맞추어지다 보니 인문학은 도태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지식사회에서의 각성들이 공감대를 이루어, 비켜두었던 인문학을 재정비하게 된 것이지 싶습니다. 인문정신이란 거창한 이념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동체와의 관계를 대립과 단절에서 소통과 화합으로 변화시키려는 의지입니다.

사람과 세상의 안쪽을 들여다 보는 공부가 인문학일 터인데,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면 답은 보이기 마련입니다. 내 친구의 고통이 무엇인지, 내 이웃의 어려움이 무엇인가를 상대의 입장에서 헤아려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돕는 것이 인문정신입니다. 훼손된 사람과 세상 본연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성찰과 사유의 내공을 쌓아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 (약육강식의 야만성)을 끊어 내는 것이 희망의 인문학일 것입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