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만든 호박전과 나물>

딸이 없어 허전할 때가 있습니다.
몸이 고단하거나 심기가 불편할 때, 집안일을 거들어 주거나 조건 없이 제 편을 들어 줄 구원의 투수가 딸이기 때문입니다. 슬하엔 아들만 둘이니 재미 없는 세월을 살게 될 거라 벌써부터 각오했었고, 세 남정네 틈에서 어찌 처신해야 잘 배겨낼 것인가도 고민해왔습니다.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로 인한 어머니의 고통을 누차 봐 왔던지라, 술과 연이 먼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차선으로 바랐던 게 아이들 만큼은 아버지의 두주불사를 닮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도 빗나갔습니다. 이를 테면 저희 집은 酒黨소굴입니다. 적자생존이라더고 이젠 술에 이골이 나 건강 해치지 않을 정도로만 마시기를 바라는데, 저의 뜻을 따라주는 아이들이 대견합니다.

소주병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술이 겁났었는데, 사흘거리 빈 소주병이 나라비를 서는 세월을 살아야 하니 술은 이제 필요악이지 싶습니다.
3부자가 모이기만 하면 집에서 술판을 벌이겠다는데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귀가할 때까지 마음이 쓰이는데, 집에서야 기다릴 일 없고 주량도 줄어드니 눈치할 수가 없습니다. 엄나무 닭백숙이 담백해서, 버섯전골이 얼큰해, 부침개가 고소해... 술판을 벌일 구실은 넘쳐 납니다. 술에 대한 생각을 바꾸니 가족(세 남정네)에 대한 생각도 느슨해졌습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순응해야 살기가 편하지 싶습니다.
나이가 드니 외출에서 돌아 오면 만사 재쳐두고 한 숨 자야 집안일에 손이 갑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달게 낮잠 한 숨을 자고 일어나니 해는 서산에 걸렸네요. 저녁을 준비해야겠다 싶어 주방으로 오니 식탁엔 이미 음식이 차려져 있지 뭐예요.
아이가 호박부침개와 수제비를 만들어 저녁상을 차려놓고 제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어미 고단한 줄을 어찌 알고 날도 더운데 이런 갸륵한 일을 했나 싶었습니다.
아이의 배려에 놀랐습니다. 딸 가진 친구들이 부럽지 않았지요.

교직에 계셨던 어머니를 도와드리기 위해 일찍부터 요리에 관심을 두었던 제 유년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머니의 퇴근시간에 맞춰 부지런히 시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여 저녁상을 준비했었지요. 그때 만든 음식들은 주로 해산물 요리였는데 주꾸미초무침이나 대하찜, 꼬막무침, 시금치된장국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집안일을 도와주는 친척언니와 함께 차렸던 건데 퇴근하신 어머니의 고마워하시던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저는 호박부침개를 채로 썰어 반죽에 섞어 만드는데 아이는 하나하나 밀가루를 입히고 계란물을 씌워 태깔 있게 만들었습니다.
호박과 감자를 썰어넣고 끓인 수제비도 맛납니다.
평생 밥솥과 씨름해야 하는 주부는 자신의 손을 빌지 않고 해결되는 한 끼가 고마울 뿐인데 아이가 차려준 저녁상은 눈물겹습니다.

사는 건 어쩌면 빚 지고 빚 갚는 과정의 연속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모님, 형제자매, 선생님, 친구와 이웃, 가족과 내가 속해 있는 조직의 구성원들 간의 관계로부터 진 빚을  갚아나가는 일이 사람구실(仁)이라 여겨집니다. 

사람구실을 하는 방도는 두 가지라고 茶山은 설명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먼저  미루어 주는 (己之所欲先施於人, 恕也- <논어고금주>) 적극적인 방법과,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 시키지 않는(己所不欲, 勿施於人-논어)  소극적인 방법이 그것이라는 것이지요. 사람구실을 위해 예를 지키고 염치를 잃지 않으려 상대와 함께 노력하는 것이 관계를 선순환으로 이끄는 관건이겠지요.

올 여름은 혹독했습니다.
폭염이 잦아들어 살 듯싶었는데 태풍이 연거퍼 휘몰아치니 정신이 달아날 지경입니다.
농사와 어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피해가 얼마나 컸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쓰립니다.
피해복구도 이재민에 대한 보상도 잘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래도 소슬바람 부는 가을은 성큼 다가왔고, 아쉬운 대로 수확의 기쁨도 누릴 수 있겠지요.
'또르르 똘똘똘', 가을이 다가옴을 알리는 귀뚜라미 소리가 반갑습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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