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겨울밤

눈 내리는 밤 
            
                      -박인극-

창 밖에 함박눈이 내리는 밤은
머얼리 두고 온
고향생각 그립다.
이웃이 도란도란 모여 앉아서
옛 이야기 즐겁게 꽃피는 마을
밤 깊은 줄 모르던 고향 생각 그립다.

함박눈 송이송이 내리는 밤은
머얼리 두고 온
그대 생각 그립다.
꿈 고인 눈동자로 쳐다보면서
새 살림을 즐겁게 속삭이던 밤
눈 알은 꽃무늬져 그대 생각 그립다.

세한추위와 가축병이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설이 다가오니 시름 모를 옛동요가 절로 떠오릅니다.
스산한 마음은 자연스레 설날의 추억이 다채로운 유년기로 회귀합니다.

설날이 가까워지면 하루가 다르게 광에 쌓이는 진기하고 맛난 음식들이 저를 행복하게 해주었지만, 보다 더 즐거웠던 기억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한 놀이 입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널뛰기와 연날리기인 듯싶네요. 방패연은 크기도 하려니와 만들기도 어렵고 연을 날리는 데도 적잖은 기술이 필요하니 저같은 여자애들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었고 그저 만만한 가오리연을 만들어 날리는 게 재미였지요.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가오리연을 들고나가 저만치서 친구들이 연을 띄워주면 얼레에 감긴 실을 풀어주며 마구 달리다 뒤를 돌아보면, 날아야 할 연은 번번히 땅바닥에 곤두박질쳐져 있곤 했지요. 그러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 한 끝에 간신히 연 날리기에 성공하면 어느새 연은 기나긴 꼬리를 흔들며 차가운 바람을 타고 푸른 창공으로 높이높이 날아 올랐지요.

아직 팔목에 힘이 붙은 것도 아니고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에 따라 연실을 조절하는 기술도 모두 젬병인 열살박이 여자아이의 손에 들린 가오리연이었지만 신명의 정도는 그 어떤 놀이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널따란 마을의 들판에는 연을 날리는 동네 아저씨들과 남자애들이 함께 날리는 방패연들의 멋진 묘기와 싸움들이 펼쳐졌는데 그 모습은 실로 장엄하기까지 한 것이었지요.

연날리기가 남성들의 놀이라면 널뛰기는 여셩들의 놀이입니다.
널뛰기는 두껍고 기다란 널빤지를 짚단이나 멍석을 말아 괴어 한 가운데에 얹고 널판의 양 끝에 각각 사람이 서서 발을 굴러 위로 솟아오르게 하는 놀이입니다.

이때 체중이 비슷한 사람끼리 한 조를 이루어 널을 뛰어야 평형을 유지하게 되는데 서는 위치를 조금씩 조정하여 균형을 맞추기도 합니다. 처음엔 약간 뒤뚱거리다가도 파트너들간의 교감으로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널을 뛰는 사람의 모습이 날개처럼 아주 가벼워보이기까지 합니다.

한 사람이 발을 굴러 뛰었다가 내려딛는 힘의 반동으로 상대편이 다시 뛰기를 번갈아 하는 이 놀이는 바깥 출입이 잦지 않던 당시의 부녀자들에게 아주 즐거운 나들이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나 처녀들 틈에 끼여 이 신명나는 놀이를 구경하기도 하고 꼬맹이들 차례가 되면 친구들과 함께 널을 뛰기도 하였지요.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놀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뒤란 절구에선 갓 쪄낸 고두밥에 삶은 쑥이 들어간 쑥인절미를 만드시느라 어머니는 분주하셨지요. 아저씨가 떡메로 뜨거운 고두밥을 향해 한 번 쿵 찧으면 어머니는 물을 축여 떡덩이를 두 손으로 얼른 아무리고 다시 떡메는 내리 쳐지고…..
그러는 사이 찹쌀옴은 점점 줄어들어 난들난들한 쑥인절미 덩어리가 되지요.

떡덩이는 함지박에 담겨 다시 고소한 콩고물이 깔린 안반 위로 옮겨져 보기좋은 떡모양을 짓고 알맞은 크기로 잘려 모양을 고른 뒤, 대나무 석작에 차곡차곡 담깁니다. 미리 고와놓은 조청에 말랑한 쑥인절미를 찍어 한 입 배어물면 입안에 감도는 쑥향이며 찹쌀의 쫀득함까지 어우러져 미각은  무한대의 행복감에 젖습니다.

겨울밤의 단란함이 어디 그뿐입니까. 촉촉히 젖은 차나락(찰볍씨)을 가마솥에 달궈진 굵은 모래에 넣고 튀겨낸 매화꽃잎 같은 고물을 얹어 만든 매화산자의 맛은, 지금은 좀체 맛볼 수 없는 우리의 귀한 전통음식이 아니던가요. 가족들이 모여앉아 길죽한 흰엿을 금세 갈라 입으로 훅 불어 누구의 엿에 더 크고 많은 구멍이 뚫렸는지를 놓고 내기를 하며 나눠먹던 엿치기도 눈물나게 그리운 겨울밤의 풍경입니다. 한 모금 입에 들이키면 매콤하고 향긋한 생강과 계피의 맛에 취해 입 안이 잠시 얼얼하던 수정과의 맛도 잊을 수 없습니다.

밤잠을 설쳐가며 가래떡을 써시는 어머니 곁에서 그 일을 거든다며 나대던 일, 밤이 이슥하도록 읽었던 세계 여러 나라의 전래동화며 형제들과 함께 한 주사위 놀이도 새록새록 떠오르는 그 시절 겨울밤의 추억들입니다. 지금이야 제철이 어느 때인지 분간조차 잘 되지 않는 하우스 먹을거리들이 넘쳐나고 그 무엇 하나 귀하다 여겨지는 음식을 찾기가 쉽지 않으니 옛음식들이 생각나고 시름 없던 그 겨울밤이 떠오를 수밖에요. 

무한대의 경쟁 속에 내몰려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로 나뉘는 청소년들의 진로도 나이 든 이의 마음을 억누르는 세태의 일면입니다. 
혹독한 추위와 가축들의 수난 만이라도 하루 빨리 수그러들어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서로 다독이고 화합하는 설명절이 될 수 있기를 간곡하게 바라봅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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