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틀 깨기/트루먼쇼와 마제스틱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내겐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일을 기적같이 해내고 싶은 `꿈`을 꿉니다.

//어느날 모든 걸 버리고 타히티로 떠난 고갱처럼 기존의 세계와 완전히 분리된 곳으로 홀연히 떠나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고 싶고, 보물섬의 주인공처럼 엄청난 갑부가 돼 평소 자신을 억압하던 상황과 사람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하고도 싶고, 신데렐라나 온달처럼 왕자나 공주를 만나 하루아침에 계단 위로 훌쩍 뛰어오르고도 싶고…

그런가 하면,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그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인간승리의 주인공이 돼보고 싶은 소망도 간직하고 삽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바로 이같은 소망을 대신 충족시켜 줍니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두려움을 무릅쓰고 자신을 둘러싼 두껍고 단단한 벽을 깨고 나오거나, `안락하지만 치사한` 삶을 버리고 `소박하지만 기쁜` 인생을 택할 때 박수를 보내게 되는 건 그런 까닭이지요. 설사 그것이 현실에선 불가능하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구석이 많아도 말입니다.

//`트루먼쇼`와 `마제스틱`은 그런 점에서 눈길을 끕니다. `트루먼쇼`가 `미디어의 개인에 대한 횡포`라는 주제를 다뤄 전반적인 호평을 받은 것과 달리 `마제스틱`은 `미국적 애국주의와 할리우드 홍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사회적 광기에 대한 개인의 항거라는 면에선 관심을 가질 만하지요.

두 영화는 `주인공이 같다`(짐 캐리)는 사실 외에도 닮은 데가 많습니다. 딸아이는 두 영화의 얼개가 아주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주인공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결국 현실과의 타협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자기 길을 택하는 구조가 거의 같기 때문이겠지요.

`트루먼쇼`의 감독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만든 피터 위어고, `마제스틱`의 감독은 `쇼생크 탈출`을 연출한 프랭크 다라본트입니다. 사람은 다르지만 사물을 보는 시각이나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닮은 영화를 만든다는 걸 보여주는 셈이지요.

주인공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와 용기를 부여하는 게 여성인 것도 두 작품의 공통점입니다. 여성은 남자의 발목이나 잡는 것으로 묘사되기 일쑤인 보통 영화와 구분되는 대목이지요.

//`트루먼쇼`는 트루먼이라는 주인공이 태어날 때부터 서른살이 될 때까지 일거수 일투족을 보여주는,제목 그대로 쇼입니다. 도시 전체를 스튜디오로 꾸미고 부모 아내 친구 이웃등 등장인물 모두를 배우로 만든 다음 5천대의 몰래카메라를 숨겨놓고 트루먼이 깨어나 잠들때까지를 몽땅 생중계하는 것이지요.

아무 것도 모르고 아침이면 이웃을 향해 “굿모닝, 이따 다시 못볼 지도 모르니 굿에프터눈 굿나잇!” 하며 지내던 트루먼은 어느날 하늘에서 촬영용 조명등이 떨어지고, 익사한 줄 알았던 아버지를 발견한 순간 누군가가 끌어가는 일을 겪은 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민하던 트루먼은 대학시절 만난 실비아가 “모든 게 가짜다”라고 했던 걸 기억하며 탈출을 결심하지요. 아버지의 익사를 목격한 뒤 그토록 무서워하던 바다로 나간 트루먼을 되돌리기 위해 제작자는 폭풍을 일으키지만 트루먼은 굴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밖으로 나가는 문앞에 선 트루먼에게 제작자는 말하지요.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나가봤자 밖엔 불확실한 것들뿐이다. 지금까지 너는 편안하게 살아왔잖니. 별 문제도 없었고. 이 안에 있는 한 네 미래는 보장된다. 밖은 위험하고 살벌하다”

그러나 트루먼은 “굿모닝, 다시 못볼 지도 모르니 굿에프터눈 굿나잇!” 하곤 망서림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마제스틱`은 매카시즘(극단적 반공주의) 바람이 거세던 50년대 초반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나리오작가로 할리우드에 신고식을 마친 피터 애플턴의 앞날은 장밋빛입니다. 영화사가 원하는 대로 써주기만 하면 벤츠로 상징되는 부가 보장되는 것도 물론이지요. 배우 애인도 있고.

그러나 대학시절 무심코 여자를 좇아 `총대신 빵을`이란 단체에 가입했던 경력에 새 영화 각본이 탄광촌 소재라는 게 문제돼 공산주의자로 몰리게 됩니다. 영화사와의 계약은 파기되고… 갑자기 닥친 기막힌 상황에 술마시고 운전하던 피터는 다리위에서 강으로 추락하고 급기야 기억을 잃은채 로슨이란 작은 마을에 도착하지요.

마을의 극장주 해리는 피터를 2차대전중 죽은 줄 알던 아들 루크라고 생각하고 마을사람들 역시 그렇게 믿습니다. 해리는 닫았던 극장의 문을 열고 피터는 2차대전중 아들들을 잃고 실의에 빠졌던 마을사람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지요.루크의 애인이던 아델과 사랑에 빠지고….

피터가 기억을 되찾아갈 즈음 FBI는 들이닥치고 피터는 청문회장에 서게 됩니다. 일이 잘못됐다는 걸 안 FBI는 반성문을 읽고 미리 작성해준 다른 공산주의자 명단을 발표하면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하지만 반성문을 읽어내려가던 피터는 “죄가 없다면 진실을 밝히라”던 아델의 말을 떠올리곤 미국 헌법에 보장된 `국가와 국민의 관계`를 부르짖습니다.

인생 끝날 줄 알았던 것과 달리 피터는 무사하고 다시 영화사 제작회의에 참석하지요. 회의 내용은 과거와 같습니다. “주인공이 장애아 꼬마라고?”“안돼. 영화가 우울해져.”“장애아 대신 개를 주인공으로 하지. ‘래시’류 영화는 늘 대박이 나.”

“개를 주인공으로 한다구요. 그러지요,뭐”라고 대답했던 과거와 달리 피터는 “웃기는 소리”라며 나와 로슨마을로 향합니다. `조금만 치사해지면` 얻을 수 있는 벤츠를 버리고 시골극장 마제스틱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트루먼이 세트 밖에 나간 걸 후회할 지, 피터가 단조로운 시골생활을 계속 할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이들이 안락하지만 견디기 힘든 `통제된 오늘`을 버리고 불안하지만 `자유로운 내일`을 선택했다는 대목이지요.

//우리는 모두 진정 용기있고 씩씩하며 너그럽고 지혜롭게 처신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현실의 굴레 속에 갇혀 실천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잠시나마 “아니다” “그럴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고, 손해인 줄 알면서도 타협을 거부할 수 있는 각오와 의지를 다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을 듯싶습니다만……

35년반의 언론인 생활 끝에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나이에 상관없이 지금이 화양연화요,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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