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장난일까, 설욕의 기회일까. 박병호가 악몽과도 같았던 트윈스의 유니폼을 다시 입게 됐다. 다만, 이번엔 LG가 아닌 미네소타다. (이 글은 ‘“왜 그런 남자와 결혼 해?”’에서 이어집니다.)

 

미네소타 트윈스의 홈 구장 타깃 필드 전광판에 박병호의 사진이 걸려있다.


사진, 미네소타 트윈스 홈페이지


 

  1. “Welcome to MLB”


 

박병호는 예상대로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메이저리그 포스팅을 신청했고, 지난달 7일 최고 응찰액이 1,285만 달러에 달한다는 결과를 통보 받았다. 당시까지 박병호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던 넥센 히어로즈 구단은 금액이 알려지자 수용 의사를 즉각 발표했다. ‘이별 준비’를 부지런히 한 탓에 토요일 아침이었음에도 지체 없었다.

이제 거액을 제시한 구단이 과연 어디이며, 이 구단이 박병호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하느냐가 문제였다. 지난해 김광현이 SK 와이번스 구단의 대승적 포스팅 수용(200만 달러)에도 본계약 이견으로 메이저리그의 꿈을 접었고, 2010년엔 일본의 이와쿠마 히사시가 끝내 도장을 찍지 못했다(결국 이와쿠마는 2012년 FA 자격을 얻어 빅리그로 갔다).

하지만 넥센의 반사적인 피드백과 관계없이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이미 주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이 동부시간으로 금요일 저녁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최고액을 제시한 구단이 어디인지 한국으로 다시 통보가 오기까지 꼬박 사흘이 걸렸다. 앞서 류현진, 강정호의 경우엔 최고 응찰액이 발표됨과 동시에 구단 역시 공개됐기에 새삼 낯선 풍경이었다.

 

  1. 돈보다 꿈


 

박병호 포스팅 승자가 미네소타 트윈스임을 최초로 알렸던 존 헤이먼 CBS 기자.


풍문도 그의 입을 거치면 사실이 된다.


 

덕분에 추측도 난무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텍사스 레인저스 등 박병호를 눈여겨보던 빅마켓 팀이 응찰했기 때문에 1,000만 달러가 넘는 금액이 나왔을 것이란 이야기가 나왔다. 우타 1루 자원이 급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유력 후보로 떠오르기도 했다. 모두 월드시리즈가 어울리는 컨텐더 팀이었다. 그가 가게 된다면 가을의 주인공도 가능해 보였다. 이 와중에 ‘박병호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강정호와 다시 한솥밥을 먹게 됐다’는 대형 오보도 나왔다. 하지만 10일 새벽 미국발 ‘믿을 만한 소식’들이 차례로 날아들면서 소동도 가라앉게 됐다. 박병호 입찰 경쟁에서 승리한 곳은 의외의 팀인 미네소타 트윈스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박병호 독점 교섭권을 1개월 동안 얻게 된 미네소타는 줄곧 협상에 대해 자신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마감 시한을 1주일이나 남겨둔 상황에서 그의 사인을 받아냈다. 류현진과 LA 다저스의 계약이 1분을 남겨놓고 극적 타결된 것에 비하면 일사천리였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박병호. 사진, 미네소타 트윈스 홈페이지


 

그래서였는지 계약 내용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연봉이 점진적으로 오른다지만 4년 총액 1,2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만약 박병호가 국내에 남는다면 2년 뒤 FA 시장에서 더 높은 호가가 예상되고 있었으므로 상위리그 진출 메리트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염가만이 문제로 지적된 것은 아니었다. 마이너리그 거부권조차 없을 정도로 조건도 좋지 않았다. 또 정확히는 4+1년 옵션 계약이었다. 옵션 행사의 권리는 구단에 있었다. 미네소타는 박병호와 4년 계약이 종료된 이후 650만 달러를 주고 계약을 1년 연장하거나, 50만 달러를 주고 계약을 종료할 수 있다. 만약 이 옵션이 실행돼 박병호가 미네소타에서 5년을 뛰고 MLB FA 시장에 나올 때는 이미 한국 나이로 36세가 된다. 대박의 꿈 따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초지일관 자신을 낮추는 박병호의 경향이 좋지 않은 계약을 만들게 된 배경으로 분석됐다. 2군을 전전하다 인생 역전에 성공한 그였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병호는 실망하지 않았다. “돈보다 꿈”이라며 자신은 기분 좋게 사인했다고 밝혔다. 오히려 한국에서 더 큰 돈을 만질 수 있었음에도 그런 기회비용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는 듯 “미국에서 야구를 할 수 있는 기회게 누구에게나 주어지진 않는다”고 감격을 표현했다. 그는 계약을 위해 미국 현지에 도착했을 때도 “어릴 때부터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게 꿈이었지만 2군에 머물며 그 꿈을 잊고 살기도 했다”면서 “이제 내겐 꿈을 이룰 기회가 생겼다”고 기대를 감추지 않았었다.

 

  1. Destiny


 

입단 기자회견에서의 박병호. 연봉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박병호의 첫해 연봉은 32억원으로, 내년부터 245억원을 받는 추신수의 1/7 수준이다. 사진, 미네소타 트윈스 홈페이지


 

박병호 포스팅에서 승자가 된 직후 “16살 때부터 지켜봐 왔다”던 미네소타는 계약 성사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도 이 말을 반복하며 그를 추켜세웠다. 하지만 그들은 구단의 극동 스카우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는 않았다. 이미 웬만한 한국 고교 야구선수들을 모두 지켜봐 왔으며, 뒤늦게라도 시장에 나온 건 박병호였을 뿐이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한 것이다.

실제로 미네소타는 이 자리에서 1루수인 박병호의 지명타자 기용을 강하게 시사했다. 골칫덩이가 된 조 마우어에게 계속 1루를 맡기겠다는 소리다.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예우 차원이기도 하지만 박병호 영입이 주전 1루수를 구하는 것이 아닌 보험의 성격임을 드러낸 것이다. 박병호의 계약 규모가 ‘돈이 아까워서라도 계속 기용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 아닌 것이 더욱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박병호는 그마저도 수용했다. 팀의 사정에 자신이 맞춰 가겠다는 것이다.

 

박병호와 조 마우어, 운명의 ‘조우’. 사진, 미네소타 트윈스 홈페이지


 

박병호가 지명타자로 출장하게 될 경우 수비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한 경기에 많아야 4~5번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더욱 우려되는 건 지명타자 자리마저도 강력한 경쟁자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시즌 주로 지명타자로 출장한 팀의 기대주 미겔 사노가 그 주인공이다. 미네소타는 박병호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사노의 외야 전향을 고려하고 있지만 거구의 외야수가 얼마나 민첩한 수비를 보여줄지는 의문이다. 그가 외야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박병호는 지명타자 출장마저도 번갈아 해야 하는 입장이 된다.

물론 박병호가 더 화끈한 방망이를 보여준다면 되겠지만 사노도 만만치 않다. 지난 시즌 데뷔한 사노는 .269 18홈런 52타점을 기록했다. 출루율과 장타율을 합친 OPS는 .916에 달했다. ‘루키 박병호’가 빅리그 첫해에 이보다 좋은 성적을 내리란 보장은 없다. 참고로 강정호는 .287 15홈런 58타점 OPS .816를 기록했지만 그에겐 유격수라는 수비 프리미엄이 있었다. 시즌 초반 그저 그런 성적에도 꾸준히 출장할 수 있는 빌미가 있었던 셈이다. 강정호는 그렇게 성적을 끌어올렸지만 박병호는 그 괜찮은 1루 수비를 보여 줄 기회조차 없다. 지명타자는 타격으로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포지션이다.

박병호가 ‘유리 멘탈’ 유형의 선수인 것도 문제다. 프리미어12 대회 결승에서 홈런을 치기 전까지 ‘성적에 대한 부담을 느끼는 박병호’가 얼마나 약한 타자인지 그의 아킬레스건이 유감없이 드러난 바 있다. 관심이 집중되면 못한다는 것.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 넥센이 준우승에 그쳤던 배경에도 박병호의 기나긴 침묵이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같은 트윈스인 LG 시절 어쩌다 잡은 기회에서 소득 없이 물러났던 수많은 타석들이 그것이다. 이름을 증명해야 할 순간일수록 그는 작아졌다.

 

프리미어12 대회에 앞서 열린 서울슈퍼시리즈 쿠바전.


삼진을 당하고 아쉬워하는 박병호. 사진, 엑스포츠


 

가장 많은 우려가 나오는 부분은 역시 투수에 대한 적응 문제다. 한 번도 접하지 못했던 수준의 투수들과의 대결에서 박병호가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메이저리그의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149km로 KBO리그보다 7km나 빠르다. 투수들이 152km를 상회하는 공을 던지는 비율도 2015시즌 9.14%(2014시즌 6.87%)에 달했다. 반대로 박병호는 올 시즌 152km 이상의 공을 33구밖에 겪어보지 못했다. 9회까지 150km를 뿌리는 에스밀 로저스와의 맞대결이 기대를 모았지만 4번의 타석에서 3번이나 삼진을 당하며 우려를 증폭시키기도 했다.

박병호는 변화구 장타율이 5할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패스트볼 공략은 거포로서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다. 구속을 차치하더라도 투심 패스트볼이나 싱커처럼 국내에선 자주 보기 힘들었던 변형 패스트볼 대처 역시 여전히 그의 빅리그 안착을 불안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에게 기대하는 건 단순한 안타가 아닌 홈런이기 때문이다.

 

  1. Dynasty


 

그러나 강정호의 성공이 박병호에 대한 의문을 상당 부분 희석시킨 것도 사실이다. 강정호는 빅리그 첫해인 올 시즌 152km 이상의 공을 상대로 가장 높은 타율(.440 50타수 22안타)을 기록한 타자가 됐는데, 이는 강속구 경험의 유무가 성적과 인과관계에 있지 않음을 증명한 사례이기도 하다. 게다가 박병호는 KBO리그 평균 구속 상위 4명인 헨리 소사, 알프레도 피가로, 조시 린드블럼, 루카스 하렐을 상대로 .319의 타율을 기록했다. 국내 최고의 교타자로 꼽히는 김현수(.135)보다 높은 수치다.

박병호가 올 시즌 기록한 53개의 홈런 가운데 13개를 용병 투수에게 기록했다는 점과(2014시즌엔 52개 중 13개), 미네소타 홈 구장 타깃 필드의 우타자 홈런 파크 팩터가 98로 중립에 가깝다는 점도 고무적이다(파크 팩터는 100을 기준으로 높을수록 홈런이 잘 나오는 구장이며, 강정호의 홈 구장인 PNC파크가 85로 리그 최저 수준이다). 특히 박병호는 전체 타구의 50.7%를 좌측으로 보냈는데, 타깃 필드의 외야는 103m 거리인 좌측 담장이 홈 플레이트에서 가장 가깝다(박병호의 홈런 평균 비거리는 123.9m).

 

박병호와 악수하는 테리 라이언 미네소타 트윈스 단장. 사진, 미네소타 트윈스 홈페이지


 

LG에서의 실패, 넥센에서의 성공이 난관을 극복하는 경험이 됐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미네소타의 테리 라이언 단장 역시 박병호의 입단식에서 이 부분에 크게 주목하며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들을 극복해 본 선수”라고 표현했다. 적응에 대해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박병호가 삼진이 많은 유형의 타자인 부분에 대해서도 “강타자들은 삼진을 달고 산다”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라이언 단장의 말대로 박병호는 극복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선수다. 앞서 박병호의 심리적인 약점에 대한 예로 프리미어12 대회를 언급했지만, 사실 이 기간 그의 부진엔 불운도 한몫 했다. 조별예선에서 2개의 홈런성 타구를 맞바람에 도둑맞았고, 일본과의 4강전에선 적시타를 호수비에 잃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반면 황재균과 함께 가장 많은 홈런(2개)를 기록했으며, ‘공략불가’로 판명 난 오타니 쇼헤이에게 유일한 멀티 히트와 2루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결승전엔 기어이 초대형 홈런을 때려냈다.

그의 커리어 절반은 나머지 절반의 부진을 만회하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 자체였다. 단지 아주 약간의 적응할 시간과 기회가 필요했을 뿐.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를 달고 다닌 지난 1년은 오히려 쇼케이스를 즐길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운명처럼 다시 입은 트윈스 유니폼. 사진, 미네소타 트윈스 홈페이지


 

박병호의 다른 강점은 그가 수준급 1루수라는 것이다. 앞으로 30~40게임 정도 보장된 1루수 출장 기간 동안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마우어를 지명타자로 밀어낼 가능성도 있다. 마우어는 팀의 영웅이기 때문에 백업 선수가 되지는 않겠지만 1루수로 전향한 지 불과 2시즌밖에 되지 않아 만족스러운 수비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박병호는 거포 중엔 드물게 ‘리그 평균은 하는’ 주루능력을 갖고 있다. 내야안타를 얻어낼 만큼 빠른 발은 아니지만 승부처라고 해서 대주자로 교체해야 하는 애물단지가 되지도 않는다. 2012시즌엔 20홈런-20도루를 달성하기도 했다.
물론 최고의 무기이자 명함은 그가 지난 4시즌 동안 KBO리그에 군림하던 왕이었다는 사실이다. 2012시즌 이후론 박병호가 아닌 홈런, 타점왕이 나온 적이 없다. 전성기 이승엽조차 4년 연속 홈런왕에 오르진 못했다. 박병호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왕조였다.

ZiPS라는 유명한 통계 예상 프로그램을 만든 댄 짐브로스키는 박병호의 메이저리그 데뷔 시즌 성적을 타율 .266 27홈런 84타점 출루율 .333 장타율 .463로 예상했다. 타율, 출루율, 장타율에 대한 예상이 아쉽지만 한국인 야수 최다 홈런이 추신수의 22개인 점을 고려하면 힘에 대한 부분은 박하지 않은 평가인 셈이다. 특히 신인이 20개 후반대의 홈런을 기록할 것이라고 내다본 점은 ‘당장 신인왕을 노릴 수 있다’고 전망한 것과 다르지 않다. 팬그래프닷컴의 유명 칼럼니스트 제프 설리반의 경우엔 박병호의 성공 여부를 의심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단언했다. “그것은 오만한 생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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