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暴炎 )속에 깃든 가을의 입자(粒子)

입력 2009-08-07 20:39 수정 2009-08-15 08:42
오늘이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다는 입추(入秋)입니다.
입추는 대서와 처서 사이에 있는 절기로 태양이 황경 135도에 위치한 날이 입기일이고 양력으로는 8월 7일 경입니다.
입추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이슬이 진하게 내리며 귀뚜라미가 운다고 하네요.
연일 폭염이 계속 되니 가스렌지에 불을 켜기가 겁이 날 지경입니다.
하지만 열대성 작물인 벼는 내리쬐는 땡볕이 생육에 아주 좋다하니 다행입니다.

종일토록 달아오른 해가 서산으로 넘어 간 후에도 열기는 식지 않아 밤이 이슥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게 됩니다.
애꿎은 냉장고 문만 몇 번이고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찬 것을 찾습니다.
그러다 가까스로 잠이 들어 눈이 뜨이는 새벽녘,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불어 오는 서늘한 바람 한 줄기는 어찌 그리도 반갑고 고마운지요.
비몽사몽간에 '아, 가을이 서서이 오고 있구나.'
한여름 속에 이미 가을의 인자가 녹아 있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예년에 보지 못했던 고추잠자리를 고향집의 마당에서 보니 깜짝 반갑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한 저녁상을 물리니 사위는 곧 어두워지고 밤하늘에 별은 총총히 빛납니다.
6월의 벌건 달이 열기 가득한 밤하늘에 걸려 있네요.
부채 하나를 들고 마당에 나와 돋자리를 펴고 누워 봅니다.
모기불 대신 모기향을 피우니 독한 향이 집안 가득 퍼져 마뜩찮지만 극성 맞은 모기는 쫓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동행한 강아지 녀석들은 마냥 좋은 모양입니다.
연신 꼬리를 흔들어대면서 마당 여기저기를 부지런히 후비고 다닙니다.
흙을 밟아보니 폐쇄된 콘크리트 공간에 적응하느라 억압되었던 야성이 되살아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향집  뜨락의 나무와 작은 풀꽃들 가까이로 다가서봅니다.
식물이 품어내는 맑은 기운이 서울에서 붙들고 다녔던  온갖 잡생각들을 다 사라지게 해줍니다.
저도 이 순간이 참 좋다 여겨져 한 없이 머무르고 싶어집니다.
고향과 자연은 생명을 깨어나게 하는 명약이 아니겠는지요.
살아 있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고, 움직인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일진대 나는 과연 과거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나 어림해 보니 어깨가  많이 움츠려듭니다.

새벽시장에 가서 햇고추와 재래종 찐강냉이, 그리고 민물 장어를 사왔습니다.
무항생제 100% 국산이라는 입간판이 눈에 들어 옵니다.
직접 잡은 것이 아니면 국산이라는 말을 믿기가 어려운 게 장어나 추어 낙지 같은 수산물입니다.
이것 정말 국산 맞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중국산이려니 생각하고 구입하려 했기에 이런 표지판을 보아도 반갑지가 않고 그렇다고 우습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입니다.
워낙 많이 속고 난 후에 오는 체념기 같은 것이겠지요.

햇고추(건고추)는 꼭지를 따고 마른 행주로 닦아서 옥상 위에다 이틀을 더 말렸습니다.
고춧가루를 빻아 고추장을 담그기 위함입니다.
뜨거운 김이 나는 옥수수를 한 자루 갖고 나와 팔고 있는 아주머니 말씀이 올 해 옥수수 농사는 비가 많이 와서 아주 버렸다고 하네요.
그래서 그런지 이 아주머니 기세가 등등합니다.
어디 봐라, 이런 강냉이 파는 이가 나 말고 어디 또 있느냐는 듯.
저는 작고 알록달록한 이 토종 옥수수를 매우 좋아라 합니다.
강원도 찰옥수수도 괴산의 대학찰옥수수도 아주 맛이 좋지만 이 오종종한 재래종 강냉이를 그 해 여름 기어이 맛 봐야 할 먹을거리 1순위에 꼽아놓습니다.
손질해 온 장어는 구이와 죽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민물장어구이>
손질 된 장어를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뺍니다.
진간장 매실액 다진마늘과 생강즙 고춧가루 계피가루 매실주 후춧가루 물엿을 혼합하여 양념장을 만듭니다.
양념장에 장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넣고 서너 시간 숙성시킵니다.
숯불 위에 석쇠로 굽는 것이 가장 좋은 맛을 내겠지만 날이 더우니 화로에 불 피우기가 번거로워 팬에 구웠습니다.
그릴이나 숯불에 구운 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양념이 타거나 흐를 염려도 없으니 뒷처리 하기도 간단하더군요.

<어죽>
장어 머리와 뼈에 참붕어 몇 마리를 더하여 마늘과 생강을 넣고 물을 넉넉히 부은 다음 다섯 시간 정도 푹 고웁니다.
흐물흐물 녹은 건더기를 소쿠리에 걸러 국물을 받친 다음 찌꺼기는 버립니다.
걸러 놓은 어즙에 불린 찹쌀과 맵쌀을 반 씩 섞어 쌀 알이 충분히 무르도록 약한 불에 죽을 끓입니다.
어죽은 마늘과 생강으로 비린내를 잡아 주면 드시기에도 역하지 않습니다. 
이 음식은 부드럽고 영양가가 풍부하여 연세 드신 어른들의 보양식으로 아주 좋은 음식입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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