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retire)란 인생의 황혼이 아니라 타이어(tire)를 다시(re) 갈아 끼운다, 즉 삶의 새로운 출발지점을 일컫는다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평균수명이 엄청나게 길어진 현실 앞에서 우리는 남아 있는 후반기의 생을 어떻게 가꾸고 도모하면서 살아야 할지 커다란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 2의 인생을 위한 준비가 잘 되어 있다면 은퇴 이후의 삶도 불안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전반기의 삶이 자녀를 기르고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인 자아성취를 위해 되돌아 볼 겨를도 없이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었다면, 새롭게 시작하는 후반기는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사는 게 가능해지니, 은퇴 전 보다 더 행복한 나날이 될 수 있습니다.

편의 시설이나 도심으로의 접근성은 좀 떨어지지만, 좋은 이웃이 있고 산수경관이 수려한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 1리에 살고 있는 친구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퇴촌면 우산리는 14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고, 그 중 퇴촌에서 천진암 쪽으로 가는 큰 길의 다리에서 왼편으로 계곡을 끼고 들어와 앵자봉 쪽으로 가는 우산 1리에는 현재 20여 가구가 살고 있습니다.

친구의 집은, 동북서가 산으로 감싸 안아주고 남쪽으로 벌어진 名堂에 터를 잡았습니다.
집 앞에는 남으로 흐르는 계곡이 있고, 수질이 좋고 수량도 많은 지하 암반수를 뿜어 올려 음용과 생활용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건축도 완벽한 친환경적인 구조물입니다.

기반 공사에 들어간 철근 콘크리트 외에는 시멘트가 별로 들어가지 않았고 황토와 천연 건자재로 시공되어 있습니다.
황토에 느릅나무 껍질과 우뭇가사리 삶은 물 , 그리고 숯가루와 목초액을 섞어 바르는 식으로 4중 처리된 집은, 단열의 효율이 높을 뿐 아니라 바깥 공기와 호흡을 하는 기능도 합니다.

집 부근의 산에는 노루 고라니가 뛰어 다니고 장끼와 까투리가 날개짓을 하며, 일년내내 계곡 물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온갖 새들의 노래 소리에 아침 눈이 뜨이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었습니다.

우산1리는, 나눔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은퇴자들과 아토피 피부로 고생하는 아이를 둔 젊은 부부가 모여들어 생긴 전원 마을이라 
합니다.
서울에 직장을 둔 가장들의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이 1시간 정도 거리라 이곳에서 생활 하는 게 가능하다고 하네요.


전원마을은 조성되었다가도 떠나는 사람이 많아 쇠락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집의 위치만을 도심에서 전원으로 옮긴 것일 뿐, 거기에 입주한 사람들이 도시인의 차갑고 개인주의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지 못한 때문일 것입니다.

도심에서는 분주한 일상 때문에 이웃을 모르고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이 느슨해진 전원에서 조차 이웃을 외면하면 그 무료함과 외로움을 버텨낼 재간은 없습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세상도 변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마음을 열지 않고 있는데 친구나 이웃이 절로 생길 리는 없습니다.

친구네는 텃밭을 따로 갖고 있지 않지만, 사시사철 땅에서 나는 유기농법의 제철 먹을거리들을 나눠 주시는 이웃 덕분에 밥상은 항상 푸른 야채들의 향연입니다.
사실 친구네가 이 마을에 들어 온 가장 큰 목적이 친구의 건강회복이었거든요.

친구는 산골에서의 일상에 적응하기가 쉽지만은 않았을 터인데도  아주 잘 견뎌냈고 건강 또한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친구가 마을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도운 주역은 남편과 이웃이었습니다.

이 마을 주민들은 1달에 한 번씩 빠지지 않고 정기적인 모임을  갖습니다.
거기서는 부락민의 경조사뿐만 아니라 각 가정에 무슨 걱정거리는 없는지 서로가 흉금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고, 일이 생긴 가정에 대해선 내일이다 싶게 합심하여 돕는다고 합니다.

도덕 교과서에서나 봤음직한 부락 공동체의 모습을, 정글같은 서울의 근거리에서 실제 상황으로 보는 저의 심회는,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정서적 물리적 환경과 음식은, 건강유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사실을, 최근 친구의 삶을 지켜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 했습니다.
요양에는 가족의 절대적인 헌신이 따라야 하는데 친구 신랑의 외조는 거의 친정 어머니에 버금 갑니다.
완벽한 친환경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나무 보일러를 설치한 터라 매일 군불울 지펴야 하는 번거로움울 마다하시지 않습니다.
틈이 나는대로 산 속의 고사목들을 수거하여 땔감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계시더군요.

'부부란 쇠사슬에 한데 묶인 죄수와 같다'고 러시아의 소설가 고리끼는 말했지요.
인생의 행 불행을 함께 걺어져야  할 운명 공동체라는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당위일 뿐, 복은 나누지만 고통은 각자의 몫으로 돌려버리는 부부도 적지 않은 게 작금의 세태입니다.

한 때, 크게 앓았던 아내의 건강회복을 위해 하시던 사업도 접고, 수 개월 발 품을 팔아 부지를 선정하여  현장에서 건축의 전 과정을 진두지휘하고 입주하신 지 5년,
소꼽 동무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어 50여 년의 세월을 동고동락하며 살아오신 모습이 한 편의 동화처럼 눈물겹습니다.

사촌처럼 지내는 이웃과, 오누이같은 친구 내외와, 오염되지 않은 먹을거리와, 사시사철 변화하는 빼어난 풍경이 있어 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우산 1리는,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아주 포근했습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