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은 우중충한데 날씨는 청명합니다.

가을 가뭄이 길어질까 조금 염려스럽지만 지금까지는 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 하네요.
벼 농사도 과일도 채소도 모두 다 작황이 좋아 풍년이다 하니 듣던 중 반가운 소식입니다.

들녘엔 벼 수확이 한참이고 채마 밭엔 무 뿌리가 하루가 다르게 굵어지고 있습니다.
어릴 적 이맘 때쯤, 집 앞 텃밭에 심어 놓은 배추와 무밭이 진 초록 일색일 때 배추 포기는 짚으로 속이 잘 차라고 윗 부분을 동여 매어주고, 무는 뿌리로 양분이 많이 가야 밑이 잘 든다시면서 무성해진 이파리를 쳐주는 작업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 보다가 어린 저도 거든다며 무잎을 따 주던 기억이 납니다.

마당에 그들막하게 쌓인 그 청청하고 오동통한 무청은 보기 좋게 엮어서 월동용 시래기 감으로 말리고, 나머지는 무청 김치를 담그셨습니다.
그저 버리기가 아까워 별 양념도 없이 버무려 놓으신 것인데도 살짝 익으면 그게 그렇게 맛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태생이 좀 덜 떨어진 인간이었나 봐요.
지금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잘 먹는 잡식성이 되었지만, 미스 때까지만 해도 육식은 거의 하지 않았거든요.

제가 여학교에 근무하던 초년병 시절의 얘기인데요, 교무실이 직원 수에 비해 많이 협소하여 작은 교실 하나를 개조하여  분실로 쓰고 있었어요.
저는 그 쪽방 식구였지요.
방이 작다보니 분위기가 아주 오밀조밀 가족 같았어요.

근무 시간이 끝나면 일주일이 멀다하고  단합 대회를 했는데 저는 그 시간이 아주 죽을 맛이었어요.
희한한 게 그 방 선생님들은 하나 같이 술을 좋아하시는 주당들만 계셨거든요.
주로 가는 곳은, 돼지내장탕이나 순대국밥집이나 보신탕집 같은 곳이었지요.

그날따라, '선생 질 오래 할려면 체력부터 다져 놓아야 된다.'면서 저를 닦달하시는데 근무 시간에 자상하던 그 모습은 전혀 아니었어요. 아주 강압적인 얼굴로 표변 하시데요.
새내기인 저로선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내심 그게 후배 사랑의 거친 표현이라 여겨 묵묵히 따랐습니다.

아뿔사, 다음 날 그 정보가 언제 샜는지 ,연세 지긋하고 꼬장꼬장하기로 소문난 교무주임 선생님은 저를 가만히 불러 아주 정색을 하고 나무라시는 거였어요.
처자(處子)가 허구한 날 보신탕집이나 들락거리면 혼인발 안 서니 다시는 그 불한당들과 합류하지 말라고요.

한데 희한한 건, 같은 방 식구인 선배 여선생님 두분 마저 저의 구원병이 되어 주시질 않는 거예요.
보신탕이며 돼지 내장 삶은 것, 애저탕(돼지 새끼 삶은 것)같은 걸 그리 게걸스럽게 잘도 잡수시더라고요.
먹는 음식을 두고, 이것은 먹네, 저것은 못 먹네 하는 것 아니라면서 기름 둥둥 뜬 돼지 내장탕 뚝배기를 제 앞에 들이 미시는 거였어요.
원 세상에...

그래 저는 밥집도 아니고 술집도 아닌 그 곳에서 무엇으로라도 입을 오물거려,그 분들의 질서에 순응하는 신참의 모습을 보여드려야 했거든요. 
궁여지책으로 목로의 한 켠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시어 꼬부라진  무청 김치에  밥 한 공기를 우걱우걱 비우는 걸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지 뭐예요.
그 때, 그거라도 없었으면 어쨌을까 싶게 무청 김치가 고맙더라고요.

무청 김치는 그야말로 거저 먹는 서민의 대표적 찬거리였지요.
그 옛날 물자가 귀하던 시절, 배고프고 버리기 아까워 먹었던 거친 음식들이 지금은 웰빙 음식으로 각광 받고 있으니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일밖에요.
오늘은 그 아련한 추억 속의 무청 김치 담가 보았네요.

무청김치는 열무김치와는 또 다른 맛이 있습니다.
좀 빳빳한 것 같으면서도 사근사근한 무청김치.
토속 음식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거다 싶게 구미가 당기실 거예요.
조금 더 있으면 줄기가 세져서 김치로 먹기는 곤란하지요.
지금이 딱 제철입니다.
무청 김치

재료
무청 한단, 고춧가루 3컵, 쪽파 반단, 양파 즙 1컵, 다진 마늘 2큰술 생강 저민 것 4쪽, 멸치 액젓 2컵, 새우젓 2큰 술, 찹쌀죽 2컵, 천일염 1컵
소금물 2리터, 밤 썰은 것 1컵

만드는 법

무청은 단이 큽니다.
누렇게 뜬 잎은 버리고 파란 잎만 추려서 소금물에 간합니다.
4시간 정도 두었다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뺍니다.
따끈한 찹쌀 죽에 멸치 액젓을 타고 고춧가루를 갭니다.
쪽파는 다듬어 씻은 후 물기를 뺍니다.
나머지 양념을 고춧가루 갠 것에 혼합하여 물기 빠진 무청과 쪽파 넣고 버무려 한 끼 분량 씩 꾸러미를 만들어 나박나박 하게 썬 밤 한쪽을 얹어 용기에 담고 하루 저녁 지나면 냉장하였다가 사오 일 후에 먹습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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