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오순옥 님>

어머니!
어머니께선 나이들수록 24 절기와 친해지면 좋다고 제게 말씀하셨어요.
그만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을 살라는 뜻이겠지요.
절기상으론 단오가 지났고 유월 유두가 다가 오고 있네요.
어머니의 연세가 올 해로 여든 하고도 둘, 어머니를 뵐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별안간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어머니가 즐겨 읽고 계시는 영어만화 <블론디>의 남편 범스테드가 좋아한다는 자연의 소리 3 가지, 빗소리, 파도 소리, 시골 소리를 어머니도  좋아한다고 하셨지요. 어머니의 딸인 저도 그 소리들이 그냥 좋아지는 건 영락없는 씨내림인가 봐요.

얼마 전 어느 지인이 쓴 '빗소리 들리는 작은 집'이라는 칼럼을 읽었어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텃밭을 가꾸며 전원에 살고자 하는 젊은 가장의 꿈이 수채화처럼 말갛게 담겨 있는 글이었지요. 그것은, 고향을 떠나온 도시 근로자들이 갖는 꿈이기도 하고 저의 꿈이기도 하기에 아주 절실하게 읽혀지데요.

서울은 타산적인 삶에 필요한 임시 기류지로 여겨질 뿐, 영주 할 생각이 없어요. 제가 오랫동안 사숙해 온 작가 이청준 선생님께서 그러시데요.
서울에서는 관계의 사회학을 배우고 고향에선 순정한 본연의 삶을 배우신다고요. <눈길>,<서편제>, <당신들의 천국>,<잔인한 도시> 같은 걸출한 작품을 써오신 미백 선생님께서 지금 암 투병 중이신데 위중하시다 해요.
부디 섭리자의 기적 같은 가호가 함께하셔서 좋은 작품으로 다시 만나 뵐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어요.

최근 부쩍 많이 회자되고 있는 바른 먹을거리에 대해 저는 오랫동안 궁구해 왔어요. 로칼푸드, 슬로푸드, 에코푸드...
모두 친환경적인 먹을거리를 일컫고 있지요. 오염된 환경으로부터 밥상을 보호하려는 뜻에서 나온 신선한 움직임들이기도 하고요.
이 모두를 두루 충족시켜 주는 밥상이 있다면, 그게 바로 우리들이 먹어야 할 최상의 음식들인 거죠.

어머니!
진리는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아주 가까이에 있댔는데 딱 맞군요.
먹어야 될 음식 파랑새를 찾아 오랫 동안 헤매던 저의 시야에 어머니의 밥상이 선연히 떠오르는 거예요. 해답은 바로 기근의 세월을 살아 오신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께서 마련하신 밥상에 있었네요.

텃밭에서 나는 온갖 야 채들이 바로 로칼푸드요,
장독대에서 뭉근히 익고 있는 간장 된장 고추장 젓갈 장아찌가 슬로푸드요. 오염되지 않은 산야에서 나는 곡물과 육류와 나물, 강과 바다에서 나는 수산물들을 조물조물 무치고 끓이고 데치면 그게 다 몸과 자연이 합일하는 신토불이 밥상인 것이지요.

어머니의 손맛으로 차려내신 밥상은 우리가 찾아 헤매던 친환경적인 음식의 전범이기도 하고, 몸에 좋은 보약과도 같은 먹을거리라는 것을 깊이 깨닫습니다.

서구의 것이면 다 영양가 높고 근사하고 좋은 음식인 줄만 알고 정신 없이 먹어대던 식습관이 비만과 성인병을 불러올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리석게도 한 쪽으로 비껴 두었던 어머니의 밥상을 다시 찾게 됩니다.

허나 세상의 환경은 턱도 없이 많이 변해 있습니다.
공해로 범벅이 된 식재료들이 넘쳐나고 유기농이나 저농약의 식재료들을 구입 하는 데 드는 고비용을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연 친화적인 밥상으로의 변화는 기어이 이루어내야 겠지요.
대충 먹고 살다 큰병이라도 들라치면, 안전한 밥상 마련에 드는 비용보다 몇 백 곱절의 비싼 의료비를 감당해야 하고 삶 마저도 황폐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평생 자연주의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
나일론과 프라스틱 제품은 물건이 아니다며  돌과 흙과 나무로 된 생활 집기들로 집안을 가득 채우셨지요.
가족 행사라도 있을 양이면, 저희들이 내려가기도 전에 미리 그 맛나고 많은 음식들을 당신 혼자 준비해 두셔서 고맙고 죄스러웠던 기억은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싱가미싱으로 손수 만드신 수 많은 면직의 옷들과 수편물, 철철이 조기며 갈치를 상자로 사다가 절이고 말려서 며느리나 딸에게 한보따리씩 싸주시던 어머니를 저는 반도 못 따라가고 있어요.

어버이날, 사온 선물을 내밀며
"엄마, 엄마가 좋아하는 '내츄럴'이에요."
하던 남동생을 보고 모인 가족들이 모두 깔갈대던 날의 정겨운 추억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님께 그토록 군림만 하시던 아버지가 은퇴하신 후로는 조곤조곤 어머니를 챙기시는 모습 또한 다행스럽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살아 생전엔 이런 모습 못 뵐 줄 알았는데......
 그 모진 세월을 잘도 견뎌오신 어머님께  느꺼운 경외의 마음을 전합니다.
10년 전, 70여년 간 교분을 이어오신 어머니의 여고시절 친구, 스스끼 님을 만나러 친구분들과 일본 여행 길에 오르시던 날 ,공항으로 잠시 뵈러 간 저에게 집에서 가져온 거라며 내미시던 삶은 달걀과 소금이 담긴 봉지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지요. 어머님께 진 빚을 아직 반나마 갚지 못해했는데  세월은 훌쩍 이순을 바라보는 능성이에 저를 데려다 놓았군요.

고속터미널이나 역에 나가보면 손수 농사 지으신 곡식이며 양념 따위를 바리바리 싸들고 상경하시는 노부모님들의 모습을 종종 봅니다.
안전한 먹을거리들을 자식에게 주시려는 사랑과 정성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제 친구의 어머니는 지난 설 전날, 매생이며 낙지 굴같은 해물들을 잔뜩
마련하여 상경 준비를 하시다가 넘어지셔서 척추 골절상을 입으셨습니다.
다행히 수술 경과가 좋아 빠르게 회복 되시고는 있지만.
대체 자식이 뭐길래......
말문이 막힙니다. 이런 눈물겨운 모습도 우리 세대에서나 볼 수 있는  마지막 풍속이겠거니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헛헛해집니다.

어머니!
심신이 건강한 어머니의 딸로 살아, 음식으로 다가가는 환경보존에 작은 기여라도 하고 싶은 게 남아 있는 날의 소망입니다.
멀리에서나마 저를 지켜봐주시고 용기 북돋워 주세요.
천리 길 머나먼 고향에 부모님 두 분만 댕그마니 사시게 하는 불효를 용서하시고, 지금처럼 건강하게 오래도록 사시길 멀리서나마 기원합니다.

 


 
다산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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