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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의 `만종`이 유명한 이유

프랑스 화가 밀레(1814-1875)의 `만종`(캔버스에 유채, 55.5×66cm, 1859년)이라는 그림을 아시는지요. 저 멀리 교회의 종탑이 아스라히 보이는 가운데 소박한 차림의 시골 부부가 밭 한가운데서 두손을 모은채 기도를 올리고 있는 그림입니다.

`이삭줍기`와 함께 밀레의 대표적인 작품이지요. 요즘엔 `저녁종`이라고도합니다. 나이든 세대에겐 어렸을 적 `모나리자`와 함께 동네 이발소나 미용실 목욕탕 등에서 너무나 흔하게 보던 그림이기도 하구요. 이 그림은 1천프랑에 해외로 팔려 나갔다가 여러 경로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왔는데 이때의 값은 처음 매매가의 8백배인 80만프랑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얼마냐구요. 물론 값이 없습니다. 프랑스에서 절대 내놓지 않으니까요.

황금빛 노을에 물든 지평선을 배경으로 일손을 놓은채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은 경건하기만 합니다. 자연과 인간, 종교가 하나가 된 순간의 고요함과 간절함은 크리스찬이 아닌 사람도 손을 모아야 할 것같은 느낌을 주지요. 해가 막 떨어진 하늘의 불타는 듯한 정경과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둑어둑한 밭 색깔의 절묘한 대비, 그속에 마주 선 부부의 진지한 표정은 보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건 단순히 그림솜씨가 훌륭해서만은 아닙니다. 탁월한 실력에 더해진 사회적 가치가 이 그림을 인구에 회자되게 만든 것이지요. 어떤 가치냐구요???

서양미술의 소재가 종교와 귀족에서 서민의 삶으로 바뀌는 계기를 제공한 가치입니다. 서양미술은 오랫동안 신화나 영웅의 이야기및 신구약 성경의 내용을 다뤘습니다.뿐만 아니라 그림과 조각은 주로 왕족과 귀족의 궁궐과 성을 장식하거나 그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밀레에 이르러 바로 이 서양미술의 오랜 전통이랄까 관행이 깨진 겁니다. 밀레는 프랑스 노르망디지방의 그레빌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1938년 파리로 진출합니다. 루브르 박물관의 명화를 모사하면서 실력을 기르는 한편 생계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 팔다 프랑스의 제2공화정이 선포되던 1848년 살롱에 `키질하는 농부`를 내놓습니다.

`만종`을 발표하기 11년전에 내놓은 이 작품이 바로 `소박파미술`이라는 서양미술사의 한 대목을 긋기 시작한 겁니다. 농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그림은 화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지요. 그러나 혁명정부 임시 내각의 좌파 내무장관인 르드뤼 롤랭이 그림을 사자 분위기는 변했습니다. 예전같았으면 외면당했을 밀레의 그림이 주목받게 된 것이지요.

밀레는 다음해인 1849년 파리에 유행하던 콜레라도 피할 겸 근처 바르비종으로 이사했습니다. 가본 분은 아시겠지만 바르비종은 한적한 시골마을입니다. 파리관광객의 필수코스처처럼 돼 있지만 실제 도착해보면 서울 근교 농촌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퐁텐블로 숲과도 가까운 이곳에서 밀레는 T.루소, C.코로 등 이른바 바르비종파 작가와 가깝게 지내면서 땅과 더불어 열심히 살아가는 농부나 양치기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지요.

바르비종파는 밀레와 비슷한 시기에 바르비종에서 활동한 일군의 화가들을 일컫습니다. 바르비종파의 다른 작가들이 풍경에 중점을 둔 반면 밀레는 사람을 주소재로 삼았지요. `씨뿌리는 사람` `우유 짜는 여인` `실 잣는 여인` `괭이 가진 남자` `젊은 어머니와 아기` `세탁하는 농가 여인`등이 모두 이때 그린 것입니다. `만종` 발표 이후 밀레는 유명해져 1867년 `밀레 회고전`은 대성황을 이뤘고 1868년엔 프랑스 최고의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받았지요.

미술 역시 이처럼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닙니다. `키질하는 농부`를 발표한 1848년이 프랑스의 제2 공화정이 선포되고 자유 평등 우애를 상징하는 삼색기가 만들어진 해가 아니었다면, 밀레가 바르비종에 정착해 살던 1850년대가 농민들의 도시 유입이 늘어나면서 농촌생활이 도시로 떠난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시기가 아니었다면 `만종`이 그토록 주목받았을 지는 아무도 단정지을 수 없는 일인 셈이지요.

물론 `만종`이나 `이삭줍기`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속엔 아름다움과 함께 서글픔이 있습니다. `만종`의 농부는 초라하고, `이삭줍기`의 여인네들의 굽혀진 허리 또한 안타깝지요. 이삭줍기라는 것 자체가 넉넉한 사람은 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림의 오른쪽 뒤편에는 말을 탄 감독관의 모습도 보입니다. 공화정이 시작됐다고 해도 농민의 대부분이 소작농이던 당시의 형편을 전하는 대목이지요.

그림은 이처럼 그것이 그려진 때의 사회상과 동시대 사람들의 삶을 고스란히 대변합니다. 지금이야 사진이 있으니 그렇지 않지만 사진술이 발달하기 전 시대의 복식이나 건축, 풍속은 그림으로 파악하지요.

우리의 경우엔 어떨까요. 박완서씨의 소설 `나목`에 나오는 화가로 유명한 박수근의 그림은 50년대 이땅의 곤궁하지만 소박하고 건강한 삶을 보여줍니다. 아이를 업은채 일하는 어머니, 장터에 간 어머니를 기다리는 오누이, 하릴없이 담뱃대를 문 시골노인등 박수근의 그림엔 우리의 지나간 세월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저는 `나목`과 함께 소설가 박완서씨가 6.25 당시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박수근을 회고하며 쓴 글을 읽은 탓인지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예술이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바로 박수근이나 밀레의 그림처럼 동시대 사물의 생명성을 있는 그대로 정성껏 가감없이 담아내는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지요. 지나치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 지 궁금합니다.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여러분은 주위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으신지요. 이사하면서 거실 벽에 걸어놓은 그림을 다시 이사갈 때까지 그대로 걸어놓고 계시진 않은지요. 지금 주위를 한 번 돌아보시지요. 아무리 바빠도 잠시 눈을 돌려 사무실 벽에 걸린 그림, 혹 달력그림이라도 한번 살펴 보시면 어떨른지요. 이 봄에 말입니다.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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