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문민정부 시절 장관을 지내고 국민의 정부 들어선 다음 대학총장으로 부임한 분의 명함을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인사차 신문사에 들렀을 때였지요. 돌아가고 난 다음 살펴보니 이름만 덜렁 있더군요. 앞뒤를 모두 살펴봐도 전화번호 하나 없었습니다. 그 황당함이란......




저는 그 뒤로 사람들의 명함을 유심히 들여다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직위가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명함의 내용이 간단하더군요. 지금도 장관들의 명함엔 이름과 전화번호만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간혹 뒷면에 영어를 곁들이는 경우엔 팩스번호 정도 한가지 더 있지요.




가로쓰기 시대에 세로 명함이 많은 것도 특징이구요.




왜 그럴까요. 명함에 이것 저것 써놓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알고, 연락하는 사람도 너무 많고.... 그러니 되도록 간단하게 만들자, 그래야 권위있어 보인다, 이런 걸까요. 물론 장관님 자신의 의사는 아니겠지요. 장관님이 쓸데없는 전화나 팩스나 이메일에 시달릴까봐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간단히 만들어드리는 것 아닐까요. 아니면 자신들의 일이 많아질까봐 미리미리 차단하는 걸까요.




취임 초기 이메일 번호까지 적혀 있던 한 여성장관의 명함이 얼마 뒤 다른 남자장관과 같은 형태로 바뀐 걸 보면 이런 의혹이 더욱 짙어집니다.


장관만 그런 게 아닙니다. 공무원들 역시 직급이 높을수록 명함을 간단히 만드는 경향이 있더군요. 국장은 이메일 주소 없고, 과장은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른바 서비스업종인 금융기관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지요.시중은행장 명함 역시 장관 명함과 아주 유사합니다. 시커먼 한자로 은행명칭과 자기 이름, 전화번호 하나가 전부지요.




물론 높은 분 명함에 이것저것 써있다고 해서 직접 연락이 되는 건 아니지요. 직통전화라고 해도 비서가 받게 마련이고 따라서 어지간한 내용은 전달되는지조차 알 수 없는게 보통입니다. 이메일 역시 직접 챙기지 않고....




그러나 명함이란 게 무엇입니까. 장관이나 은행장 명함 받을 때 이름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전화번호야 전화번호부에도 나와 있는 것이고....




간단한 건 또 그렇다치고, 명함을 왜 그렇게 한자투성이로 만드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20대는 물론 30-40대 가운데서도 한글전용 교육 탓에 중고교 시절 한자를 거의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화부장 시절 이름에 `애`자가 들어가는 기자가 있었는데 이 글자가 한자로 너무 어려워 대부분의 보도자료가 `갈`로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로 읽는 것이었지요. 저는 그 기자에게 기사 뒤에 붙이는 이름을 한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기자들 이름을 모두 한자로 표기했었는데 그 뒤 한글로 급속히 바뀌더군요.




이름이야 고유명사라서 할수 없다 쳐도(어려운 한자엔 한글로 토를 달아주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전화`라는 글씨나 주소까지 일일이 한자로 시커멓게 만드는 까닭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요??




지금은 신문의 제호가 거의 모두 한글로 바뀌었습니다만 예전엔 `일간스포츠`의 `일간`도 한자로 돼 있었습니다. 당시 한글로 바꾸는 걸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日刊스포츠`를 읽게 했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고 `日刊`도 웬만큼 알았지만 `刊`자만 따로 떼놓으니 읽는 사람의 현저히 줄었다는 겁니다.




이런 마당에 아직도 한글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명함을 갖고 다니는 분들이 많은 건 무슨 까닭일까요. 회사나 기관,조직에서 그렇게 만들어주니 그냥 갖고 다니는 게 대부분이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회사에서 주는 명함에 나름대로 필요한 부분을 넣거나 빼서 자신만의 독특한 명함을 만드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받은 사람이 언제 받았는지 메모해둘 수 있도록 명함 오른쪽 맨위에 `년 월 일`을 첨가하거나


***한 귀퉁이에 언제적 명함인지 알수 있도록 이른바 버전(2001)을 곁들이거나


***알리고 싶은 홈페이지나 사이트 주소를 가장 큰 글씨로 새겨넣은 것등이 그것이지요.




명함을 보고 있으면 흥미롭습니다. 같은 게 하나도 없고, 직업별 특징도 두드러집니다.


***회사원 명함은 회사이름이나 로고가 강조돼 있지만


***변호사나 의사등은 자기이름을 제일 잘보이는 곳에 새겨 넣습니다


***교수는 나이든 교수와 젊은 교수가 상당히 다르고(이메일 주소 여부등)


***법대 교수들은 유독 한자를 좋아합니다


***박사들은 명함에 박사임을 강조하는 걸 좋아하는데, 일례로 현직 고양시장은 지금도 고양시장 명함에 경영학박사라고 써놓았습니다.


***얼굴사진을 넣는 사람도 있고, 유명한 봉두완씨처럼 영문명함 뒷면에 이력을 상세히 적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자들 명함엔 한글로 된 게 많지요.


***특정직업이 뭔지 모르는 사람일수록 명함이 복잡한 경향도 있구요.




여러분의 명함은 어떤지요. 회사에서 명함을 받을 때, 한번쯤 자신의 필요에 따라 무엇인가 더하거나 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셨는지요????




저는 명함은 자신을 알리기 위한 것인 만큼 깔끔하고, 되도록 한글로 쓰고, 언제적 것인지 알수 있게 버전을 넣고, 그리고 괜찮다면 연월일 표시도 해줘 받는사람이 메모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요란스럽지 않되 개성과 정성을 느끼게 하는 명함, 괜찮지 않을까요??? 자기만의 명함을 만드는 건, 작지만 자신의 인생을 디자인하는 작업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가끔 생활속에서 아름다운 반란은 시도해보는 것.....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시는지요?????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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