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때때로 떠오르는, 혹은 마음의 좌표가 되는 시(詩)를 갖고 계시는지요. 저는 책상 앞에 2편의 시를 붙여두고 있습니다. 한가지는 한용운선생의 `당신을 보았습니다`이고, 다른 하나는 김종길선생의 `설날 아침에`입니다.




두가지 모두 유명한 작품이니 아시는 분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는 아주 오래 전부터, `설날 아침에`는 5-6년 전부터 자주 읽습니다. 주위에서 직장 혹은 개인적인 일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e메일로 보내주기도 하구요.




내용에서 드러나듯 두 시의 성격은 전혀 다릅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가 몹시 비장한 느낌을 준다면 `설날 아침에`는 따뜻하고 푸근하지요. 이렇게 분위기가 상이한 시를 모두 좋아하는 건 제 마음이 양쪽을 왔다 갔다 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쪽에 마음이 훨씬 더 많이 기울었지요. `여자라서, 빽이 없어서` 억울하고 분한 일이 종종 생겼고 그럴 때면 이 시를 읽곤 했습니다. 읽다 보면 그야말로 남에 대한 격분이 저 자신에 대한 슬픔으로 변해 콧등이 시큰해지고 그러면 남몰래 한바탕 울곤 "그래, 그러니 남한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힘을 기르는 수밖에..." 다짐하곤 했습니다.


"세상만사 자기 책임이 80%이상인데, 뭐. 억울하면 출세해야지" 그러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세월은 사람을 바꿔 놓나 봅니다. 언제부터인가, 예전 같았으면 무심코 지나쳤을 `설날 아침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 아침에 눈 뜨면 출근할 직장이 있고, 저녁이면 돌아갈 가정이 있고, 표정 어두우면 눈치 보며 걱정해주는 식구들과 선후배가 있고, 좋은 일 궂은 일 함께 해주는 이웃이 있고.....정말 감사한 일이다" 싶어진 것이지요.




이후로 속상하고 우울한 일이 있으면 `설날 아침에`를 읽어 봅니다. 한결 마음이 가라앉는 건 물론 `사소한 일에 목숨 거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며칠 사이 고맙고 감사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미소짓게 됩니다.




물론 이것조차 `자기 합리화`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이 들고, 세상은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고, 한계는 더 커지고, 그러다 보니 작은 일에 감사하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하려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자기 위안이라도 할수 없다면 이 삭막하고 험하고 쓸쓸한 세상의 강을 어떻게 무사히 건널 수 있겠습니까.




`설날 아침에`로 달래지지 않으면 `당신을 보았습니다`를 다시 읽으면서 입술을 깨물어 봅니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지, 그렇지???" 하면서요. 그럼 한동안 늘어졌던 심신도 추스려지고 바짝 긴장도 하게 됩니다. `열심히 살아봐야지` 싶구요.




두 편의 시를 옮겨 적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엔 어느쪽이 더 가깝게 닿을지 궁금합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매양 추위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잔 술과/ 한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속에/ 한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 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늦깎이 훈장이 된 글쟁이. 내 인생의 꼭지점이 아직 남아 있겠거니 믿으며 매사 열심히 대드는 철 안든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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