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통해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겐 절호의 기회가 온다. - 에머슨

아픔을 이기려는 자아에게!

늘 아프지만 아파도 아파할 수 없는 자아여! 그동안 부족해서 아프고 미안해서 아팠다. 아파도 참는 게 인생(忍生)이 아니겠는가? 도자기가 아름다운 것은 불구덩이에서 구워졌기 때문. 살아 있기에 아플 수밖에 없고, 아프기에 강해진다고 위로하자. 잘난 친구를 만나면 꿈을 보여주고, 아픈 친구를 만나면 내 아픔을 감추자. 아픔이 다가오면 ‘왜’ 아픈가를 묻지 말고 ‘어떻게’ 아픔을 이길 것인가를 생각하자. 있음은 없음으로, 없음은 있음으로 순환하고, 땡감은 서리를 맞아야 달콤한 홍시로 변하는 법, 평화는 아픔이 지나간 자리에 피는 마음의 꽃이며, 행복은 아픔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월계관이라고 노래하자.

아픔을 견디지 못해 자주 폭발하는 자아여! 그동안 아픔은 살아있다는 증거임을 모르고 아픔을 탓하고 피하려고만 했다. 맞바람의 저항을 받지 않고 순탄하게 달리는 차(車)가 어디 있으랴?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은 땅속의 어둠을 이기고 버텼기 때문. 마음대로 안 된다고 자신감의 키를 낮추지 말고, 뜻대로 안 된다고 의심의 칼로 믿음을 베지 마라. 아픔은 오만을 통제하는 통증이며, 슬픔은 겸손하게 만드는 떨림이다. 배우는 무대에서 졸지 않고, 주인은 자기 일로 불평하지 않는 법. 인생이란 책임임을 깨달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자. 아픔과 슬픔은 인생의 약. 오는 아픔을 막지 말고, 가는 아픔이라고 방심하지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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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어려서 잔병치레가 많았다.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어려서부터 했지만 자주 아팠다. 어려서 아버지의 투병생활을 지켜보면서 ‘인간은 왜 아픈가?’ 라는 조숙한 생각을 했지만, 몸의 아픔보다 마음의 아픔이 더 무섭고, 아픔의 9할은 내가 만든다는 것을 나이 50이 되어서야 알았다. 낫질을 하다가 실수로 손을 베였을 때 느꼈던 화끈거림은 몸을 잘 관리하라는 경고였고, 축구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의 쓰라린 고통, 마취가 풀렸을 때 느끼던 통증, 음주후의 속 쓰림과 허탈감은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을 때 주어지는 형벌이었다.

이사를 하고 창틀에 끼인 이물질을 쉽게 한 번에 제거하려다가 손톱을 깨트렸다. 물론 소량의 피도 났다. 손톱 사이로 피가 솟으면서 세상에는 쉬운 일도, 공짜도, 한 번에 되는 일도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쉽고 편하게 살려고 했던 마음 자세를 반성했다. 이사를 하고 짐을 풀면서 장교로 임관할 때 수립한 인생계획서를 보았다. <군인의 길, 한길로 매진하여 국가와 민족을 이롭게 한다. 군인으로 죽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청년 시절의 기상에 잠시 뭉클하면서도, 모진 아픔을 겪고 운명이 바뀐 인생에 마냥 우울해 했다.

30년 전의 나의 제1의 인생계획서에는 실패와 실수, 손실과 낭패, 좌절과 상처라는 어두운 위기가 오면 어떻게 하겠다는 우발계획이 전혀 없었다. 미래의 아픔을 예측할 수 없었기에 인생계획서에는 큰 아픔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아픔이 찾아 왔을 때 혼란과 충격이 컸다. 제1의 인생계획서는 인생 과업이 추상적이었고, 출세라는 본심이 영광으로 미화되어 있었다. 제1구간 인생은 전투적인 경쟁으로 즐거운 일마저 아팠고, 제일주의의 풍토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평화를 잃었다. 일은 즐거운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는데 일이 전부인 줄 알았고, 진급과 좋은 보직은 일시적 기쁨에 불과했는데 그 자체가 행복인 줄 알고 목숨을 걸었다. 허공에 떠 있는 행복을 쫓아가느라 발밑에 무수한 행복들이 밟히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류시화 시인의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을 읽고, 빨리 읽었더라면 일이 즐겁고 행복한 생활을 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끼며, 제2의 인생계획서를 작성했다. 평온하고 행복한 제2의 인생을 위해 과거를 운명으로 정리하고 다짐을 했다. <아픔 없이 오는 평화와 행복은 없다. 살아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자체가 평화다. 몸과 마음은 아파도 영혼은 아프지 않겠다. 행복하겠다는 영혼의 의지로 가까운 사람부터 즐겁게 하자.>

아파도 참는 게 인생이다.

세상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굴러가고 인생은 아픔으로 성숙한다. 인생은 고난과 아픔을 극복하는 드라마이며, 인간은 아픔으로 행복을 빚는 도공이다. 몸이 아픈 것은 살아 있기 때문이며, 마음이 아픈 것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아픔은 두뇌의 통제를 따르는 몸과 마음이 만든 작품으로 아픔은 이분법이다. 자연재해 같은 자연이 제공하는 아픔과 인간이 만든 아픔, 작은 아픔도 있고 친구는 물론 가족에게도 털어 놓지 못할 깊은 아픔도 있다. 억압에서 오는 아픔과 스스로 억압해서 만든 아픔, 정(情)이 많아도 아픔이 되고, 정이 없어도 병이 되는 게 인생이다. 욱신거림, 결림, 화끈거림, 몸살, 속 쓰림 어지러움 등의 육체적 아픔도 있고, 배신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자기 실수로 인한 자괴감, 죽음의 공포 등 정신적 아픔도 있다. 가시에 찔렸을 때 잠시 따끔거렸다가 사라지는 아픔도 있고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잠재의식에 박혀서 심장마저 오그라들게 하는 큰 아픔도 한다. 용서하고 화합할 수 없는 상극의 아픔도 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아픔을 주는 벌레들이 있다. 고요할 때면 찾아오는 치통(齒痛) 같은 주기적인 아픔, 피만 빨고 배설할 줄 모르는 진드기 같은 무한 욕심이 만든 아픔, 작고 여린 배추애벌레에서 나비로 탈바꿈하는 전화위복의 아픔, 여린 잎 뒤에 숨어서 수액을 빠는 진딧물 같은 집요한 아픔, 겉은 화려하지만 힘이 없어서 당하는 무당벌레 같은 스스로 미신과 징크스에 잡히는 아픔, 긴 세월 고난의 길을 걷지만 뜻을 펴지도 못하고 너무도 짧게 사는 하루살이 같은 운명적 아픔 등 아픔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대다수의 아픔은 불완전한 내가 만드는 아픔들이다.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면 아픔은 아픔을 번식시켜 벌레 먹은 나뭇잎처럼 자아의 원형을 잃게 하고 건강을 위협하고 행동위축으로 추한 자화상을 만든다.

아픔의 9할은 내가 만든 작품이다. 남이 준 아픔도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만든 아픔이다. 남이 나를 아프게 하더라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냥 지나가는 일에 불과하다. 아픔을 탓하면 아픔은 더 커진다. 나의 일은 높게 인정받으려고 하면서도 타인의 가치는 낮추려고 하다가 다툼을 만들고, 홀로 잘 하려다가 외롭고, 일을 쉽게 하려고 하면 실망과 두려움이 생긴다. 학생이 공부를 쉽고 하려고 하면 공부가 지겨워 지고, 직장인이 일을 쉽게 하려고 하면 일에 빈틈이 생기고, 군인이 훈련을 쉽게 하려고 하면 전쟁이 두려워진다.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평가하는 엇물린 세상이다. 일을 쉽게 성사시키려고 하면 가던 아픔이 다시 돌아오고, 오던 행운은 사라진다. 내가 만든 아픔이라면 소리 없이 참아야 한다.

아픔과 기쁨은 단짝이다. 아픔을 겪지 않고 느낄 수 있는 기쁨은 방귀밖에 없다. 그냥 오는 아픔도 없고 노력 없이 오는 우연한 행운도 없다. 아픔과 기쁨은 필연적인 결과다. 기쁨은 아픔을 이긴 결과이며, 아픔은 유혹과 기쁨을 절제하지 못한 후유증이다.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도 주어가 될 수 없고 화려한 포장도 내용물이 될 수 없다. 기쁨과 아픔 사이에 수식어는 없다. 기쁨이 주어가 되면 아픔은 동사가 된다. 껍데기 포장술의 유혹과 말로 거는 승부는 일시적인 기쁨을 주고 긴 아픔을 준다. 성형으로 얼굴을 꾸밀 수는 있어도 마음까지 바꿀 수는 없다. 외모 때문에 손해를 본다고 꾸미고 포장하면 반드시 육체는 고통으로 보답하며, 체면 때문에 형식과 거짓에 빠지면 정신은 우울증에 시달린다.

큰 아픔으로 작은 아픔을 치유하자.

큰 아픔으로 작은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이 아파 본 자의 역설이다. 다행이 단순한 두뇌는 2가지 아픔을 동시에 기억하지 못한다. 큰 아픔이 오면 작은 아픔은 밀려나간다. 인생은 고해(苦海)이기에 아플 수밖에 없다고 위로하고, 웬만한 아픔은 ‘그래도 다행이다.’라고 자기 마취를 걸자. 몸과 마음은 하나이기에 몸과 마음 둘 중에 하나만 아파도 함께 아프다. 그래서 인생은 아픔이 많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아프다는 것을 알고 내 아픔만 이야기하지 마라. 폭풍우를 겪지 않고 피는 꽃이 있다면 그 열매를 기대하지 마라. 몸과 마음이 아픔으로 떨리기에 영혼은 더 강해지는 법. 나의 아픔을 진단하고 처방하는 것은 의사가 아니라 나다. 아픔 없이 오는 행복은 없음을 알고 큰 아픔으로 작은 아픔을 치유하고, 살기 위해 나쁜 기억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자. 그러나 지독한 마음이 없으면 아픔을 치유하기는 정말로 어렵더이다.

큰 진통(鎭痛)으로 작은 진통을 치유하자. 밤이면 욱신거리는 썩은 어금니의 진통보다 무서운 진통은 고요할 때 기어 나와 존재를 비참하게 만드는 아픈 기억의 진통이다. 진통 없이 태어나 성장하는 생명체는 없다. 아픔을 치유할 만병통치약은 없다. 아픈 만큼만 아파하자. 인생고해(苦海)를 먹어치울 아귀는 없기에 밝은 눈으로 아픔의 덫을 식별하고, 아픔이 누적되어 진통으로 자라지 못하게 마음의 삽으로 아픈 기억을 매장하자. 진통을 멈출 발명품과 아픔을 치유할 진통제는 없다. 진통제로 위까지 아프게 하지 말고, 자연의 힘으로 진통을 다스리고, 큰 진통으로 작은 진통을 이기고, 수련으로 진통을 줄이자.

용서와 포용으로 치유(治癒)하자. 내가 남에게 준 상처는 참회로 치유하고, 내가 입은 상처는 용서와 포용으로 치유하자. 남에게 받은 아픔보다 내가 만든 아픔이 많다. 남 탓을 하기 전에 자기반성을 하자. 아픔을 씻어내지 못하면 사라지지 않는다. 아픔을 벌레를 보듯 피하지 말고, 용서로 아픔과 상처를 아물게 하자. 내 마음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어려움은 웃음으로! 힘든 일은 즐겁게! 라고 노래하자.

인생의 무통(無痛)지대 - 황금, 소금, 지금

고통을 줄이는 3금이 있다고 한다. 3금은 금혼(禁婚), 금연(禁煙), 금주(禁酒)가 아니라 황금, 소금, 지금이라고 한다. 황금은 물질의 풍요를 의미하고 소금은 정신이 썩지 않게 하는 촉매제를 의미한다. 행복이 황금이라면 평화는 소금이며, 행복과 평화가 만나는 곳은 지금이다. 황금과 소금은 인간의 품격을 좌우하기에 황금과 소금의 중요성은 누구나 안다. 지나친 황금은 아픔을 주지만 적절한 황금은 기쁨을 주고, 너무 진한 소금은 갈증을 주지만 적절한 농도의 소금은 입맛을 돋우듯, 정신의 세계 또한 적절한 선에서 만족을 찾아야 인생 통증이 없다.
인생 통증을 줄이려면 지금을 소비하라. 뒤를 돌아보며 미련 떨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면 그 자체가 고통이다. 허상과 싸우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집중하면 고통을 느낄 시간이 없다. 현재의 순간을 소홀히 하거나 희생하면 살아있음의 희열을 느낄 수 없다. ‘지금’은 기회를 잡게 하는 시간의 황금이면서, 의식이 썩지 않고 살아 움직이게 하는 정신의 소금이다. 지금이 허술하게 지나가면 결과도 허술하다. 나가느냐? 멈추느냐? 판단과 행동은 지금 이 순간에 결정된다. 인생은 현재의 연속인데 지금을 놓치거나 부실하게 보내면 인생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인생의 교훈이 되는 여러 종류(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스피노자의 사과, 가장 사랑스런 이에게 준다는 아프로디테의 황금사과)의 사과가 있다. 썩는 사과가 아깝다고 썩는 사과부터 먹는 사람은 끝까지 썩은 사과를 먹게 되고, 일단 싱싱한 사과부터 먹는 사람은 끝까지 온전한 사과를 먹는다. 미래의 희망에 잡혀 현재를 희생하면 삶은 고되고 남는 것은 불안이다. 미래를 위한 사과나무는 심어야 하지만, 현재 먹어야 할 사과를 아끼면 불량한 사과만 먹게 된다. 미래를 의식하되, 현재 중심의 가치관과 행동이 지금의 평화와 행복을 만든다.
박필규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1984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1988년 '국방일보' 호국문예 수필 분야 당선, 2004년 중령으로 예편, 월간『시 사랑』을 통해서 등단, 2004년부터 작가로 활동 중이며, 인문학과 군사학을 접목한 새로운 집필 영역 개척, 2014년 '군인을 위한 행복 이야기', 2013년 '버리면 행복한 것들' , 2012년 '군인을 위한 경제 이야기', 2009년 '경제형 인간' , 2008년 '행동언어' , 2004년 '마주보기 사랑' 출판. 현재 파주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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