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비오는 날, 직장을 정리하고 버스를 탔다. 마음의 눈까지 흐려진 탓인지, 버스 번호를 잘못 보고 승차하여 엉뚱한 곳에 내렸다. 택시는 없었고, 지나가는 차에 손짓으로 sos를 보냈지만, 다들 외면했다. 결국 빗길 1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왔다.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번호 하나도 제대로 인식 못하는 나의 고등 허약성을 반성했고, 내가 보고 믿고 있는 것이 전부일까? 내 마음이 모두 내 마음인가? 인간이 과연 만물의 영장(靈長)인가? 정의와 공정, 진리와 휴머니즘, 아름다움과 발전은 실존하는 언어인가? 운전 코스시험에서 경계선을 밟은 탈락 차량처럼 경고음이 크게 울렸다. ‘인간은 정말로 위대한 생명체인가?’

인간성 회복을 위해 스스로 만든 위대성을 부정해야 한다.
인간은 신이 만든 위대한 존재인가? 아니면 우주가 우연히 만든 박테리아의 진화체인가?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는 고등 생명체인가? 아니면 태어나 먹이를 고민하고, 짝을 지어 유전자를 물려주고 죽는 동물과 다를 게 없는가? 예민한 주제로 기존 믿음에 혼란을 주자는 것은 아니다. 생각에 따라서 인간은 위대한 존재일 수 있고 반대로 동물로 내려갈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지금 지구촌과 우리사회를 보면 인간의 위대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어두운 면들이 많다. 자기만 살려는 작은 존재들만 보인다. 굶어죽는 백성을 외면하고 무기개발과 구매에 돈을 사용하는 악당국가들, 신(神)의 이름으로 테러를 자행하는 원리주의자, 개발을 이유로 후손의 존재기반인 자연을 파괴하는 개발세력, 물질과 성공의 새장에 갇혀 있는 인간군상을 보라. 어디에도 위대했던 흔적과 위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인생은 헛된 수고인가? 아름다운 수고인가?
테러가 자행되는 지구촌, 유전자 전달 목적도 아니면서 성에 빠지고, 끊이지 않는 성범죄, 자기욕심은 세균처럼 남에게 몰래 침투하면서 남의 욕심엔 저주하고, 타종교 경전 태우기, 자기와 자기 이익집단 외에는 주변을 보지 못하는 외눈박이, 앞선 자의 탐욕이 넘치는 사회에서 인간해방을 이야기하는 휴머니즘은 죽은 시인의 노래에 불가하다. 유전자 기술, 나노 기술까지 발전해도 마음 바탕과 본능을 개선하지 못한다. 인간의 위대성과 개선의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인류에게 남는 게 뭘까? 나 홀로 폼 잡는 독선 세력과 빈자들의 갈등, 인구의 자연 증가, 기상 불순과 식량 부족, 전쟁과 테러 위협 등 갈수록 살기 힘든 세상이 될 것이다. 앞으로 사는 길은 기술과 능력이 아니다. 마음을 편하고 낙천적으로 관리하는 지혜와 서로 살려는 상생(相生)만이 인간과 세상을 살릴 것이다.

1) 함께 살려는 상생이 세상을 구한다.
상생(相生)은 서로 도우며 더불어 사는 것을 말한다. 상생은 인간 내면의 아름다움, 서로 조화 있게 어울리는 행동이다. 상생은 인류가 충돌과 갈등에 종지부를 찍고, 같이 살기 위해 선택을 해야 하는 덕목이다. 상생은 크게 인간과 자연과의 상생, 인간끼리의 상생, 생명체끼리의 상생으로 구분된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후손들의 생존 기반을 미리 파괴하는 짓이므로 인간과 자연은 상생 관계로 가야하고, 인간이 존엄한 존재로 서로 살려면 상대를 나의 일부로 인식하여 인간끼리의 상생을 추구해야 하며, 150만 종의 생명체가 질서를 유지하고 서로 살게 하려면 유전자 조작을 금지하여 생명체끼리의 상생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상생은 어려운 용어가 아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 넘어진 사람에게 손을 잡아주는 것, 그가 원하는 것을 맞추어 주는 행동, 나의 장점을 베풀어 함께 사는 것도 다 상생이다.

2) 상생의 행복을 위한 덕목들. - 인정, 포용, 초월.
세상은 음양의 조화, 투쟁과 협조, 꽃과 똥의 공존 등 서로 어울리는 구조다. 자기만 살려고 하면 서로 죽는다. 숲에서 나무들이 빛을 향해 줄기 뻗기를 하다가 서로 엉켜서 죽듯, 인간 세상도 서로 자기만 살려고 하면 화를 입는다. 장미와 쓰레기가 혼재한다. 모든 존재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생명체라는 것을 알면 상생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자기 이익을 앞세우면 대립과 다툼 속에 빠진다. 파리가 먹이에 집착하다가 끈끈이에 잡히는 꼴과 같다. 대립과 다툼에서 벗어나 상생으로 가려면 1) 서로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인정하고, 갈등을 상생의 이름으로 포용해야 한다. 2) 자연의 순환 흐름을 이해하고 따라야 한다.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리고, 넘치기 전에 나누고 낮추며, 다툼이 생기기 전에 욕심을 멈추고 상대를 배려하고, 다툼이 생기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상생은 형식과 조건을 초월하고 악에도 선으로 대응하는 비체계적 논리다. 터져 나오는 웃음이 조건 없는 생체 반응이듯, 상생은 조건과 이해관계를 초월한다. 있는 그대로 사는 자연처럼 조건을 초월해야 한다. 인간이 자연의 속성에 근접한 것이 자비와 사랑, 덕성과 포용, 애틋함과 감사한 마음이다. 흙이 자연으로 돌아간 생명체를 분해하듯, 자비와 사랑은 복잡한 이해관계를 분해하는 약이며, 덕과 포용은 서로 감싸는 향기이며, 애틋한 감성은 인류가 같은 후손들임을 알게 하는 기억회생제이며, 감사한 마음은 서로 인정하고 격려하는 에너지다.
3) 통찰과 조화로 얻는 상생의 행복
통찰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다. 통찰은 민들레 홀씨 하나 날리는 것을 보면서 내년 봄을 느끼는 직감이며, 상대도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아는 혜안이다. 통찰이 없는 사회는 자기주장만 한다. 성장과 분배라는 전혀 다른 경제정책, 감세와 증세라는 조세정책, 포용과 압박의 대북정책,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과 보이는 국가 권력의 손을 놓고 고민하는 부동산 정책 등 같은 본질을 놓고도 서로 다른 처방전으로 대립한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나의 잣대로만 상대를 보면 미움과 다툼이 생기지만, 상대를 이해하고 들여다보면 다들 먹고 살려는 애틋함이 보이고, 때로는 측은함도 엿보이면서 서로 어울리는 공간을 찾게 한다.

상생은 조화를 이룬 상태다. 상생은 인간 간의 조화, 물질과 정신의 조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한다. 상생의 기운이 생기면, 내가 필요한 자리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관심을 갖게 되고, 물질의 수레에 정신을 함께 실어서 중심과 평화를 함께 얻고, 필요한 물질은 챙겨서 정신의 양식으로 삼게 되고, 하늘 기운으로 영혼을 보충하여 이미 아름다운 세상을 더 평화롭게 하려고 한다. 이제 상생의 정신으로 서로 행복한 길을 찾아야 한다. 상생의 행복을 누리려면 나와 남을 동시에 보고, 나의 말 한마디에 남이 다치지 않도록 신중하고, 다수에게 이로운 행동이 되도록 필요한 행동을 하고, 어려운 상대를 보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펴야 한다. 카리스마 있는 영혼, 남에게는 따뜻함을 주는 영혼, 중심이 잡혀 흔들리지 영혼으로 통찰과 조화를 동시에 키우고, 내가 중요한 만큼 상대도 귀하게 대우해야 한다.

오늘 이 순간, 나를 돌아보자. 나의 뿌리와 나의 정체(正體)성은 무엇인가? 남에게 원한과 피해를 주는 일은 없는지?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 것인가? 영원한 진리로 삼을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도 어려운 이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아량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부족한 것은 다듬고 채워야 한다.
박필규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1984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1988년 '국방일보' 호국문예 수필 분야 당선, 2004년 중령으로 예편, 월간『시 사랑』을 통해서 등단, 2004년부터 작가로 활동 중이며, 인문학과 군사학을 접목한 새로운 집필 영역 개척, 2014년 '군인을 위한 행복 이야기', 2013년 '버리면 행복한 것들' , 2012년 '군인을 위한 경제 이야기', 2009년 '경제형 인간' , 2008년 '행동언어' , 2004년 '마주보기 사랑' 출판. 현재 파주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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