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상견(好相見: 좋은 낯으로 서로 보게 된다)

                                                             - 사평역에서

명심보감 계성편에 보면 범사(凡事)에 유인정(留人情)이면 후래(後來)에 호상견(好相見)이니라는 구절이 있다. 이 뜻은 모든 일에 인정을 남겨두라 뒷날 만났을 때는 좋은 낯으로 서로 보게 되리라.

요즘 여행에 관련된 책를 보고 있다. <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 <세도나 스토리 > 등을 보고 있다. 그걸 읽으면서 정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사람들이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들을 “시간의 여행자”이니 “지구별 여행자”라고 한다.사는 것 자체가 여행하는 것, 맞는 것 같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또 늘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대합실에 있는지도 모른다.

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금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같은 입술 담배 연기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장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이 시를 읽으면 마치 한편의 영화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겨울 밤 창밖에는 눈이 오고 대합실 안에는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다.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이 그려진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 몇 명은, 오지 않는 차를 기다리며 졸고 있고, 누군가는 감기로 고생하고 있고, 누군가는 살아온 내력이 다양해도 그 사연을 다 가슴속에만 묻어두고, 모두들 사는 것이 다 어려운 사람들이 모였다. 그래도 그들에게 눈꽃이 있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어 고단하고 쓸쓸한 삶에 위안이 된다.

우리는 다 어디론가 가야하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직장,  결혼, 출산, 입학 등 새로운 삶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순간도 있고 그냥 업무상으로 맨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져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길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사람들 때문에 내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 만나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할 때 거기에 내가 있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 기억속에도 그리웠던 순간들을 많이 호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건국대 대학원에서 현대시를 전공한 후 학생들에게 아름다운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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