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3000달러, 노트북컴퓨터 100달러, 휴대전화 10달러, 국내선 항공티켓 10달러, 유럽 내의 국제노선 20달러, 원피스 10달러, 트렌치코트 20달러... 음, 10년 전 가격표인가? 10년 전에도 가격이 저렇게 낮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혹시 사기나 흠 있는 물건이 아닐까? 터무니없이 싼 걸 보니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 아니면 가격표에 0이 하나 빠진 것 아냐? 맞아. 점원의 실수일지도 몰라. 설마 저 가격이 제대로 된 가격이겠어?”

위 가격표를 보고 무언가 잘못된 가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정상가격이고 품질도 이상이 없는 신제품이며 최근의 가격이 맞다. 이미 시장에 나온 제품도 있고 조만간 선보일 제품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 정상가격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저 가격으로 팔아도 이익이 남을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세월을 거슬러 가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저토록 싼 가격대로 팔 수 있단 말인가?

캐리의 선택 : Fashion is not a luxury

<섹스앤더시티(Sex and The City)>에서 주인공 캐리 역을 맡은 사라 제시카 파커(Sarah Jessica Parker)가 의류사업 진출을 선언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이 고급 브랜드를 예상했다. 고가의 마놀로블라닉을 즐겨 신고 명품 핸드백을 들고 다니며 사치와 소비를 일삼던 그녀의 드라마 속 이미지와 함께, 뉴욕을 대표하는 패션 스타로 세련된 패션 감각을 자랑하는 그녀의 실체적 이미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선보인 브랜드 ‘비튼(BITTEN)’은 옷 가격이 20달러 이하로 책정된 초저가 의류 브랜드였다. 단돈 몇 만 원이면 최신 유행의 패션 아이템을 위아래로 쫙 빼입을 수 있는 것이다. 덕분에 미국 전역에서 동시에 문을 연 200개의 비튼 매장에서는 연일 제품이 동날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비튼이 탄생하기 전, 사라 제시카 파커는 미국의 유명의류 유통업체인 스티브앤배리스(Steve & Barry’s)에 디자이너로 합류해 모든 여성을 위한 최고 품질의 컬렉션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비튼’이라는 브랜드를 생각해냈고, “패션은 럭셔리한 것이 아니다(Fashion is not a luxury)”라는 브랜드 슬로건을 직접 만들어내 의류업에 뛰어든 것이다.

물론 미국의 패션 시장은 이미 ZARA, H&M, Mango 등의 패스트 패션들이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다. 값비싼 명품의 세련된 디자인을 차용해 최신 유행을 빠르고 값싸게 전달하는 패스트 패션은 저가 소비문화를 대중화시킨 장본인이다. 그런데 비튼은 이들 패스트 패션의 대표적인 브랜드보다 값이 싸다. 사라 제시카 파커의 선택은 패스트 패션이자 초저가 패션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소비자들은 적은 돈으로도 충분히 세련되고 화려한 패션을 구현하게 해준 그녀에게 열광한다. 사라 제시카 파커는 패션 소비의 진입장벽을 대폭 낮춰 굳이 패션에 돈을 쓰지 않던 사람들까지도 저가 소비의 유혹에 빠지도록 했던 것이다. 패션 소비에 익숙해지고 중독되면 결국 소비자들은 더욱 자주 지갑을 열게 된다.

싼(inexpensive) 것과 싸구려(cheap)는 다르다?

무조건 싼 것이 비지떡은 아니다. 싸지만 세련되고 품질 좋은 상품을 파는 브랜드는 갈수록 늘고 있다. 따라서 싼 게 비지떡이라는 공식은 더 이상 모든 저가 상품에 적용할 수 없다. 실제로 패션 소비자 중에는 버버리의 코트, 샤넬의 원피스를 사는 프리미엄 고객이 ZARA나 Mango에서 저가의 옷을 사기도 한다. 이는 가격이 싸면서도 디자인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저가 옷이 저렴하면서도 디자인이 백화점 수준인 셈이니 당연히 경쟁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결코 싸다는 것을 내세우지 않는다. 단지 최신 유행과 세련미, 패셔너블한 디자인을 내세울 뿐이다. 소비자는 싸다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싸면서도 디자인이 만족스럽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저가 마케팅은 싸지만 품질은 다소 떨어지는 것을 소비자가 감수하도록 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을 유지한 셈이다. 그런데 최근의 저가 마케팅에서는 가격과 함께 디자인을 무기로 삼아 소비자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

특히 저가 마케팅은 절대적 저가가 아닌 상대적 저가인 경우가 많다. 몇 천 원, 몇 만 원짜리가 아니라 몇 십만 원이나 몇 백만 원 하는 경우도 상대적으로 저가라면 소비자는 반응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명품 아울렛도 저가 마케팅이다. 본래 고가의 명품이라 아울렛에서도 절대적 금액 자체는 비싸지만, 할인율이 40~70퍼센트 이상이 되기 때문에 소비자의 심리적 가격 인식은 저가로 자리 잡는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명품 브랜드가 짝퉁 시장을 봉쇄하면서 아울렛 시장을 양성화해 명품 브랜드에 대한 진입 기회를 늘리는 접근을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기술 진화가 원가를 낮춘다

갈수록 기술은 진화하고 있고 이는 IT기기의 부품가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은 제품 가격을 떨어뜨리기보다 다른 기능을 추가해 가격을 유지하거나 오히려 더 높이고 있다. 일종의 기능 비대증인 셈이다. 덕분에 우리는 기본 기능 외에 쓰지도 않을 수많은 기능, 심지어 무슨 기능이 있는지도 모를 기능에 돈을 써야만 한다.
사실 원가 인하로 인한 가격 인하 요건이 발생하더라도 기업의 입장에서는 굳이 가격을 떨어뜨릴 이유는 없다. 자발적으로 매출을 떨어뜨릴 이유가 어디 있는가? 오히려 기능을 더욱 늘려 떨어진 원가만큼의 보완을 통해 가격을 유지하는 것이 기업의 입장에서는 더욱 효과적인 선택이다. PC나 휴대전화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기능 비대증을 덜어내고 제품의 단순성과 본원적 목적성에만 치중하면 가격 인하 요인은 매우 많다. 100달러 노트북이나 10달러 휴대전화가 싸구려가 아닌 저가의 질 좋은 제품으로 가능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기능 비대증을 덜어내는 저가 제품이 속속 등장하게 되면 IT 기기에서의 초저가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실제로 가격을 낮추려면 얼마든지 낮출 수 있지만, 기업은 일부러 낮추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기술적 진화는 가격 인하의 요인을 제공한다. 다양한 기능을 칩 하나에 통합하는 원칩 기술은 PC와 휴대전화 저가화의 또 다른 원동력이다. 칩이 하나면 부품도 줄어들고 원가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 있다. 앞으로 IT 기기의 초저가 혁명은 기능 비대증 탈피, 부품의 간소화, 공장 자동화로 인한 인건비 절감 등에서 오는 가격 인하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이것은 자동차도 마찬가지이다. 자동차의 달리는 기능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교통수단으로서의 본원적 기능에는 차이가 없지만 자동차의 각종 편의사양과 부가기능은 점점 늘고 있다. 자동차의 에너지가 달리는 곳에만 쓰이지 않고 점점 차의 새로운 기능을 구동하는 데 많이 쓰이는 것이다. 이는 곧 자동차의 본원적 기능에만 충실하면 가격 인하 요인은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소비문화에 중독시켜라
기업이 가장 꺼리는 소비자는 한번 산 물건을 고장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사용하다가 고장이 나면 고쳐서 사용하는 사람이다. 사는 것보다 기존의 것을 재활용하려는 사람이 많아지면 소비는 위축되기 때문이다. 즉, 소비자의 소비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소비에 중독시키는 것이야말로 기업을 위한 최고이자 최선의 미션인 것이다.
쇼핑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에 해당될 만큼 보편적이다. 문제는 돈이다. 돈이 있으면 활발한 소비를 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소비문화에 익숙해지게 된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소비가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저가 혹은 초저가 마케팅은 소비문화에 익숙해질 수 있는 계층의 범위를 더욱 넓히게 된다. 가격이 싸지면 더 많은 사람이 소비에 동참하고 더 많은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다.

저가 소비문화로 소비의 진입장벽이 낮아져 소비대상이 확대되면 싸게 팔아도 장기적으로는 이익이 된다. 그리고 일단 소비에 길들여진 소비자는 서서히 가격이 올라도 소비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저가 마케팅의 가장 강력한 영향력은 쉽게 사고 쉽게 소모시킬 수 있게 만들어 소비하는 즐거움에 중독시키는 것이다. 저가 상품 소비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면 소비자는 상품에 대한 애착도 떨어지고 쓰고 버리는 소비문화에 익숙해지게 된다. 특히 새것에 대한 선호를 높이면 지속적인 소비를 생성할 수 있다.

- 김용섭 날카로운상상력연구소장(www.digitalcreator.co.kr)


* 본 칼럼은 제가 쓴 책 <소비자가 진화한다 (김용섭 저, 김영사, 2008. 3)>의 내용을 참조했습니다. 관련된 보다 구체적인 내용까지 궁금하시다면 책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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