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한국경제신문


 

1. 순종의 종언


인터넷 신조어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주로 두 개 이상의 낱말이 결합된 합성어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의미를 바로 알기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첫 음절을 따 부르는 축약형이 아닐 땐 단어가 원래 갖고 있던 뜻에서 벗어나거나 확장되어 쓰이기 때문에 유추하기조차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는 종종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시대상이 여과 없이 반영된다는 점이다.

최근 인터넷 포털사이트 뉴스 댓글란 등에서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유교 탈레반’은 드물게 위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단어다. 사상적 거리가 멀어 보이는 유교와 탈레반이 21세기 한국에서 절묘한 결합을 한 것이다. 은어 ‘꼰대’의 대체어로서 말이다.

유교와 탈레반은 엄격한 근본주의와 결속력에서 교집합을 이루지만 여기서 탈레반은 철저히 테러리스트로 격하되어 유교를 꾸며주는 데 그친다. 즉, 구태에 대한 강요는 테러와 다름 없다는 의미다. 정확히는 권위주의적이고 전근대적이어서 실리가 없음을 비꼰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유불선 가운데 유교만이 원죄를 쓴 건 유가사상에 대한 직접적인 배척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지난 2천년 동아시아 사상의 중심이었고, 특히 조선에서는 망국에 이르도록 득세한 학문이 성리학이었다는 점에서 기성세대의 이데올로기는 유교로 통칭된다.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다루었던 ‘열정페이’ 역시 ‘유교 탈레반’과 일맥상통한다. 자기희생은 노력의 다른 이름이었고 성실과 충성의 척도이자 때론 성공의 발판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 이젠 착취요 병폐다.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순 없지만 기성세대-라는 세대-의 가치관을 그 아래 세대가 승계 거부한 것이다.

 

2. 新사문난적


정년연장과 취업난으로 말미암은 청년실업이 세대갈등을 부추긴다는 분석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들을 데려다 놓을 자리에 아버지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경쟁이지 갈등이 아니다. 아들들도 아버지의 퇴직은 가정의 비극이란 걸 잘 알기 때문에 아무도 은퇴를 종용한 바 없다. 하석상대 식으로 청년실업을 해결해도 장년실업 또한 문제가 될 것이므로 결국 한 가정에서 공유되는 슬픔이다. 갈등이란 표현은 고용유연화를 위한 구실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갈등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달관에 대한 정당화라든가 앞서 말한 가치관 충돌 등에서 비롯되고 있다.

특히 시대마다 반복되는 “요즘 아이들은 버릇 없다”라거나 “요즘 군대는 편해서”라는 ‘요즘 타령’에 ‘요즘 세대’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그래서 뭐”라고 공격적으로 응수한다. 스승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던 때는 지났고, 사병의 편의가 개선되는 것은 병영 선진화의 궁극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런 반격은 일면식조차 없는 사이에서도 나이로 상하관계가 가려지는 사회의 암묵적 합의에 대해 ‘요즘 세대’가 품고 있는 적개심과 무관하지 않다. 기성세대가 “나는 더 가난한 시절에 더 힘든 과정을 거쳤다”는 식으로 상대적 우위를 전제하려 드는 것을 부정하고 차단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로서는 경험과 성취가 늘 후배 세대보다 앞서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과정의 번거로움마저 자부심의 근원으로 삼는 편인데, 후배들은 이러한 자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류의 과거 미화는 지난달 삼성에서 직장 내 세대차이를 조사한 ‘공감할 수 없는 기성세대의 정신’ 중 세 번째로 꼽히기도 했다(41.6%, 복수응답). 이 조사에서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인 항목은 ‘회사를 위한 개인의 희생(51.0%)’이고, 그 다음은 ‘상명하복(43.2%)’이다.

반대로 기성세대가 꼽은 ‘황당한 신세대 정신’은 ‘개인주의(54.5%)’, ‘소속감과 애사심 부족(29.7%)’, ‘근거 없는 자신감(28.7%)’ 순으로 집계됐다.

비록 직장 내 설문이긴 하지만 길거리 조사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성세대는 공동체에 있어서 전체주의와 위계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있으며, 신세대는 이를 최우선 타도 목표로 삼고 있다.
다만 지금까지는 무난히 대물림 되어 왔기 때문에 신세대의 이런 반기가 기성세대로서는 조금 곤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우리)는 잘 참고 버텼는데 너(너희)는 왜 못 하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면 이 역시 과거미화의 반감을 사는 것이다. 지금 세대에겐 관습과 전례가 아닌 당장의 절대적인 가부가 중요하다. 과거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쪽의 양보만을 바랄 일은 아니다. ‘유교 탈레반’을 선뜻 입에 담기 어려운 것은 단어가 가진 공격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과거에 대한 무차별적 부정의 성격에 있다. ‘노병이 죽지 않는’게 교리를 남기기 때문이듯, 지금 세대가 산업시대와 민주화 시대의 교훈을 유물 취급하며 배우려는 노력을 중단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세대 갈등이 공론화 될 때마다 아무도 변하지 않았고 아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해와 존중보다는 한쪽의 도태로 마무리 될 것이며, 이것은 ‘사라지는’ 노병 쪽일 가능성이 높다. 우려되는 것은 지금의 신세대가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다. 보다 과격해진 ‘요즘 세대’를 만나서 그때도 “우리 땐 안 그랬다”고 말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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