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입력 2015-02-04 17:29 수정 2015-02-05 10:29
 



 

## 1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다음 번에는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며 살리라
완벽하게만 살려고 하지 않으리라

매사에 여유를 갖고 긴장을 푼 채로
세상사를 받아들이고
항상 몸을 부드럽게 가꾸며 살리라

가능한 한 모든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으리라

자연의 운명에 나를 떠맡긴 채
주어지는 일상에 감사하고
또 더 많은 기회를 붙잡으리라

더 자주 여행을 다니고
더 자주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하루의 삶에 감사하리라

- 미국의 한 묘비명

 

## 2

결혼 생활 5년 동안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은 그 절반 쯤이었을 것이다. 그 절반의 절반 이상의 밤을 나나 그녀 가운데 하나 혹은 둘다 밤을 새워 일하거나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모든 기쁨과 쾌락을 일단 유보해 두고, 그것들을 나중에 더 크게 왕창 한꺼번에 누리기로 하고, 우리는 주말 여행이나 영화 구경이나 댄스파티나 쇼핑이나 피크닉을 극도로 절제했다.

그 즈음의 그녀가 간혹 내게 말했었다.

"당신은 마치 행복해질까봐 겁내는 사람 같아요."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다섯 살 때였나 봐요. 어느 날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피아노를 실은 트럭이 와서 우리 집 앞에 서는 거예요. 난 지금도 그때의 흥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아빠가 바로 그 시절을 놓치고 몇 년 뒤에 피아노 백 대를 사줬다고 해도 내게 그런 감격을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예요."

서울의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내게 이런 편지를 보내시곤 했다.

"어떤 때의 시련은 큰 그릇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련이란 보통의 그릇을 찌그러뜨려 놓기가 일쑤란다."

애니웨이, 미국 생활 5년 만에 그녀는 변호사가 되었고, 나는 신문사의 지사장이 되었다. 현지의 교포 사회에서는 젊은 부부의 성공 사례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벗어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3층짜리 새 집을 지어 이사한 한 달 뒤에 그녀와 나는 결혼 생활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바꾸어 말하면 이혼에 성공했다. 그때 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 버린 댓가로…"

- 김한길 의원의 미국 유학 시절 이야기. 에세이집 '눈뜨면 없어라'에서

 

## 3

이런 얘기를 들었어. 엄마가 깜박 잠이 든 사이 아기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난간 위에서 놀고 있었대. 난간 밖은 허공이었지. 잠에서 깨어난 엄마는 난간의 아기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름을 부르려 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가,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엄마는 숨을 죽이며 아기에게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갔어. 그러고는 온몸의 힘을 모아 아기를 끌어안았어. 그런데 아기를 향해 내뻗은 두 손에 잡힌 것은 허공 한줌뿐이었지. 순간 엄마는 숨이 그만 멎어버렸어. 다행히도 아기는 난간 이쪽으로 굴러 떨어졌지. 아기가 울자 죽은 엄마는 꿈에서 깬 듯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달렸어. 아기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어. 죽은 엄마는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 뉘었어. 아기를 토닥거리면서 곁에 누운 엄마는 그후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지. 죽은 엄마는 그제서야 마음놓고 죽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건 그냥 만들어낸 얘기가 아닐지 몰라.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나는 비어 있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어. 텅 비어 있을 때에도 그것은 꽉 차 있곤 했지. 속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날밤 참으로 많은 걸 놓아주었어. 허공 한줌까지도 허공에 돌려주려는 듯 말야.

- 나희덕 시 '허공 한줌' 전문

 

살다보면 왕왕 과욕을 열정으로 포장한 현학적인 수사들을 접합니다. 완벽히 성공해야 하고 반드시 행복해야 하고…. 그런 성취가 없으면 '아름다운 삶'이 아니라는 믿음들이지요. 그러나 인생이 어디 그리 만만한가요. 설사 목적을 이룬다 해도 더 큰 목표가 제시되는 악순환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 소개한 이야기들 속에는 늦었지만 집착에서 벗어난, 작지만 큰 성찰이 담겨 있습니다. 한 무명인은 죽음에 이르러, 한 정치인은 이혼한 뒤 소소한 일상의 귀중함을 깨닫습니다. 시인은 판타지 같은 아기 이야기를 들은 후 '많은 것들'을 놓아주고 자유를 얻었네요.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을 거쳐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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