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은 주관적일까? 객관적일까? 시간이든 공간이든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객관적인 시간길이는 무엇으로 잴 수 있을까? 좋아하는 사람과 있다 보면 한 시간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가는데 싫어하는 사람과는 10분도 지겹다. 시간에 객관성이 사라지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아무 데 앉아서 이야기를 해도 즐겁지만 지겨운 사람과는 전망좋은 커피숍에 앉아 있어도 답답하기만 하다. 공간의 객관성 역시 사라지는 것이다.

여행을 하다가 길을 물을 때가 있다. 몇 년 전에 청송의 산골 오지를 걸어서 트레킹을 하다가 산골에서 일하는 농부를 발견하고는 길을 물었다. 다음 마을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리느냐고. 그랬더니 그 농부는 조금만 가면 된다고 하면서 산길을 가리켰다. 그 길이 두 시간 이상 걸렸다. 그 농부에게는 금방인 길이 나에게는 엄청난 거리였던 것이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 혹은 여러 가지 가치 또한 극히 주관적이다. 음식도 마찬가지고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는 좋은 대상이 다른 누구에게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일정한 시간동안 삶을 누리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시간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변화 혹은 변하지 않는 곳에서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곳에 시간이 존재한다고 하면 우리가 살아 온 과거와 살아가는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꿰뚫는 것을 시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나에게 시간이란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동안 시간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시계를 발명했다. 시계가 없다면 답답해질까 혹은 초연해질까? 시간에 구속된 삶이라면 시계라는 물건을 벗어던져도 좋을 것이다. 더구나 시간이 아니라 시계에 구속되어 있다면 말이다.

시계는 인류문명이 시작할 때부터 약 6천년이나 사용되었다고 한다. 최초의 시계는 아마 해시계였을 것이다. 해시계는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되었는데 태양빛에 의해 생기는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각을 표시하는 그노몬(gnomon)이었다. 해시계는 18세기경까지 사용하였다.

물시계는 날씨가 좋지 않거나 야간에는 사용할 수 있도록 고인된 것으로서 기원전 1400년경 역시 고대 이집트에서 쓰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5세가 장영실이 세종의 명을 받아 물시계의 일종인 누각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모래시계, 불시계 등이 쓰이다가 14세기부터 기계시계가 만들어졌고 금속기술 등의 발달로 오늘날 우리가 차고 있는 시계로 발전되었다. 시계는 몇 천 원짜리 전자시계부터 수천만 원짜리 보석시계까지 있으니 시간을 보는 기능에서 패션의 용도로 많이 확장되었다.

사실 시계 그 자체보다 시간의 중요성을 가끔 망각할 때가 있다. 일본의 나가노 시계점은 시간의 중요성을 설파한 멋진 광고를 만들었다. 그 중 [시간의 상인]이라는 광고 카피를 보자.



그 상인은 시간을 팔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시간은 어떠세요? 1분부터 주문받습니다"

어떤 남자는 상인으로부터 한 시간을 샀다. 한 시간을 산 남자는 독서의 시간으로 썼다.
한 여자는 일주일을 샀다. 그것으로 해외여행을 했다

"십년을 갖고 싶은데"

어떤 노인이 상인에게 물었다.

"손님, 십년이면 무척 비싼데요"
"상관없네. 십년을 주게"

십년을 산 노인은 그것을 병에 걸린 아내에게 양보했다.

-시간에 드라마를 나가노



또 일 년에 한번 탄생일이 오듯이 하루에 한번 탄생시간이 온다는 [Happy Birth Time]광고도 만들었다. 내가 태어난 시간은 어머니로부터 들을 바에 의하면 아마도 3, 4시쯤. 뭐 정확하지 않겠지만 태어난 시간은 분명 있을 것이니 매일 매일 태어난 시간을 축하할 일이다. 그것이 삶의 축복일 테니 말이다.

나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그 가치는 얼마일까? 문득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나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작가 /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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