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벽에 걸린 여자, 당신은 누구?

소리의 품격을 논하는 옛 선비들에게 최고는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 끈 푸는 소리’였다고 합니다. 이제 막 열리려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경외심의 발로…. 내게는 근착 시집 봉투를 뜯을 때의 느낌이 그러합니다. 갓 배달된 잉크 냄새에서는 묘한 호기심과 흥분까지 느끼게 되지요. 오늘 소개하는 두 신작 시집에서도 세상을 바라보는 신선한 안목과 정제된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벽에 걸린 여자/ 김옥경

벌거벗고 누운 여자의 행적이 궁금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불러도 대답이 없다
무슨 이유인지 계절을 벗은 그녀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그녀
둥근 엉덩이 사이로 향나무 숲 냄새가 난다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는다

세월이 얼룩진 벽
그 벽에 몸을 걸어놓은 채
붙박이가 된 여자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본다
시치미를 떼고 있는
뻔뻔스러움이 번들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지려는 순간
수천의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여자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그녀가 누구인지
멈춰 선 시곗바늘이 힐끔 곁눈질하는
그녀의 곁에 누워본다
어제의 하루보다 더 늙어버린 오늘의 하루
무슨 이유인지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
이불을 끌어안고 벽 쪽을 향한다
나른하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 사이
흰 털이 날린다

입 벌어진 눈곱의 절반이 떨어진다
눈을 뜨고 누운 나, 옷을 입고 있는 나
아무에게나 얼굴을 보여주는 나
가끔 사람들은 묻는다, 당신은 누구지

 

세월이 빠진 바다/ 김옥경

이해하기보다는 분노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그러면서도
나는 분노를 부인하고
얼마나 깊이 빠졌는지
이미 예고된 울음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바다

잘 따지지 않는 코르크 마개처럼
단단하게 박힌 슬픔이 여기저기
구멍마다 마른 고요가 불길에 싸여
타닥, 타닥

세월이 바다에 빠지고 빠지지 못한 세월이
빠르게 지나도록
가급적 눈에 띄길 바라지 않는 소녀처럼
어둠 속에 커지는 동공, 노랗게 변한다
세상이 노래진다, 잠시 현기증이 오지만
노란빛은 달이 되어 여기저기서 떠오른다

– 시집 ‘벽에 걸린 여자'(두엄, 2014)에서. 김옥경:  대구 출생, 2013년 ‘시와사람’으로 등단.

 

상사화/ 박정선

한 여자가
비단옷 입고 밤길 걷는다
새벽달 발걸음소리 쌓인다
사랑 한 번 진하게 했으면 됐지
입추에
혼자 울었다

 

쉿/ 박정선

창문 열자
마른 낙엽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터앉아있다
악수를 청하는 손님
하얗게 가슴 떨린다
휭하니
찬바람 지나가자
가슴 꽁꽁 묶고 있던
실밥마저 터져버린다
하얀 나비
창문 너머에 서 있다
섣달
초하루 새벽

– 시집 ‘라싸로 가는 풍경소리’ (시와에세이, 2014)에서. 박정선: 금산 출생, 2010년 ‘호서문학’으로 등단.

 

마산에서 태어나 중앙대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주부생활ㆍ일요신문을 거쳐 한국경제신문에 입사, 22년 동안 편집부 기자와 종합편집부장ㆍ편집위원으로 일했고요. 2009년 계간 '시에' 시부문 신인상으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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