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산' 하면 으레 진달래를 떠올린다.


'진달래' 하면 또 소월 詩 '진달래꽃'이 떠오른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그러나 소월이 노래한 '영변 약산'은 더이상 서정적이지 않다.
진달래꽃 대신 공포의 핵무기시설이 자리잡고 있어 그러하다.


영변에 약산 핵무기시설
깡그리 싹쓸어 버리오리다
가시는 골짝골짝 박힌 핵시설
과감히 깨부수고 가시옵소서




가슴 아프지만,'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은 詩句로만 간직하고,
'강화에 고려산 진달래꽃'으로 위안 삼아야겠다.


고려산은 강화읍내에서 5㎞쯤 떨어져 있는 높이 436m의 야트막한 산이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이 산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전해진다.
고려산의 옛 명칭은 오련산(五蓮山)이다.





고구려 장수왕 때 인도 승려 천축조사가 이 산에 올라
다섯 색상의 연꽃이 피어 있는 오련지를 발견하였는데,
천축조사는 이 연꽃들을 하늘에 날려 이들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황련사, 흑련사를 세웠다고 한다.
이를 일러 오련사라 했고 이 절을 품고 있는 산을 오련산이라 했다.


몇해 전 적석사를 들머리로 낙조봉 거쳐 고려산에 올랐다가
다시 적석사로 원점회귀한 적이 있다.
그때도 진달래꽃 인파가 겁나 진달래 철을 지나 찾았었다.


이번엔 逆으로 백련사를 들머리로 고려산 거쳐 낙조봉 올랐다가
다시 백련사로 되돌아 내려서는 것으로 코스로 잡았다.
이번 역시 진달래와는 상관없는 계절에 진달래산을 찾았다.




 

백련사 뜰안에 주차를 했다. 절집이 한적하다.
오색 연꽃을 하늘에 날려 흰 연꽃이 떨어진 곳에 세웠다는 '白蓮寺'다.
절마당 옆 나무계단을 딛고 오르면 가파른 멍석길이 이어진다.
시각적으로는 황톳길이다.
흙도 패이지 않고 비가 와도 질퍽거리지 않겠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멍석의 느낌이 딱 좋다.
근래 산길에서 이런 멍석길을 자주 맞닥뜨린다.




 

절마당을 출발해 숲길을 20여분 쯤 걸었을까,
돌연 숲이 열리더니 생뚱맞게 아스팔트길이 등장했다.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군부대로 통하는 길이라 일반 차량은 출입금지다.
바로 이 아스팔트길이 끝나는 지점이 고려산 정상인게다.





그늘없이 햇살 쨍쨍한 텅빈 도로를 구비 돌아 걸어 오른다.
길옆 풀섶에 핀 구절초와 억새가 가을바람에 하늘거린다.
도로 모퉁이 전망데크에 서니, 탁트인 서쪽은 한 폭의 그림이다.
파란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아스라하고, 바둑판처럼 반듯한 농지와
야트막한 산과 마을이 오밀조밀 정겹다.


그러나 눈을 조금만 북쪽으로 돌려보면 헐벗은 산야가
가물가물 시야에 잡힌다. 북쪽은 여전히 무채색이다.





고려산 봉우리는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정상(436m)임을 표시한 이정표는
"청룡부대가 있는 한 서부전선 이상없다"라 적힌 안내판과 함께
부대 앞 등로 길목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그러고보니 코 앞에 北을 둔 그야말로 최전방이다.


이곳에서 낙조봉(343m)까지는 2.9km.
한갓진 탐방로를 따라 유유자적하며 낙조봉으로 향한다.
4월이면 이 일대 능선은 진달래꽃으로 뒤덮여 장관을 이룰 것이고
탐방로는 아마도 교행이 어려울만큼 인산인해가 될 것이다.


 

진달래가 절정인 4월이 지나면 고려산은 다시 한적 모드로 바뀐다.
고려산의 또다른 매력으로 아름다운 낙조를 꼽을 수 있다.
해질녘 낙조봉에 올라 '오메가'를 품는 행운도 기대하며...


강화도의 고만고만한 산에 반한 산우 K는 수개월에 걸쳐
강화도의 여러 산을 찾아 발자욱을 남겼다.
그는 "강화도 산이야말로 사유하기 딱좋아 힐링코스로 제격"이라 했다.
그의 강추로 혈구산, 퇴모산 그리고 고려산을 다시 찾게 된 것.



낙조봉 방면으로 능선을 따라 1km 정도 진행하다 보면
흩어진 돌무더기를 보호키 위한 목책이 눈에 들어온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 '강화 고천리 고인돌 群이다.
안내판이 없으면 누구라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
그저 그런 돌무더기일 뿐이다.


강화도 고인돌무덤의 고임돌이나 덮개돌에 사용된 석재는 같은 재질로
강화에서 흔하게 보이는 화강편마암이다.
무덤 주위에 이만한 석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먼 돌산이나 해안에서
바위를 채석하여 운반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적석사 갈림길에 이르자, 억새능선이 펼쳐진다.
왼쪽으로 10여분 정도 내려가면 적석사다.
억새능선을 헤치고 500m만 나아가면 강화8경 중 하나인 낙조봉이다.
한낮이라 낙조봉의 진수는 느낄 수 없었지만
갯바람에 춤추는 은빛 억새숲 너머로 탁트인 바다와
드높은 가을하늘이 해질녘 낙조의 아쉬움을 대신했다.


이곳 낙조봉에서 곧장 2km를 걸으면 미꾸지고개다.
백련사에 차를 두고 온 터라 이곳에서 유턴할 수밖에.



다시 고인돌군, 진달래능선, 고려산 정상을 거쳐 백련사로 통하는
아스팔트길로 접어들었는데, 올라 올때 미처 못본 물건?을 발견했다.


"이곳까지 싣고 와서 저렇게 풀섶에 버리고 갈게 뭐람 ㅉㅉ"


산우K가 혀를 끌끌 차며 내뱉기에 돌아보니 아이스크림 냉동고였다.
그때 뒤따르던 옆지기 역시 "몹쓸 인간들"하며 다가서더니,
깜짝 놀라 일행을 불러 세웠다.



놀랍게도 버려진 냉동고가 아니었다.
냉동고 위엔 '아이스크림 1,000원, 잔돈은 거슬러 가세요'라 적혀 있다.
냉동고 미닫이문을 열어보았다. 두어 종류의 꽁꽁 얼린 아이스크림이
가지런히 가득 들어 있었다.
놀랍고 신기함에 일행 숫자대로 4개를 꺼낸 뒤 5,000원권을
거스르기 위해 냉동고 위 박스 뚜껑을 들췄다.
박스 안엔 1,000원 권 여러장이 납작한 돌멩이에 눌러져 있었다.
돌멩이를 들어 1,000원을 빼고서 5,000원권을 끼워 넣었다.
우연찮게 완벽한 무인판매를 경험한 것이다.



서로를 믿는다는 것,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잃어버렸다.
어지러운 세상을 경계하며 긴장하며 살다보니 언제부턴가
사람이 사람을 믿는 일은 어리석고도 위험한 일이 되고 말았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냉동고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오가는 이 뜸한 이곳에 아이스크림을 갔다 놓았을까?
어쩌면 아이스크림 판매가 목적이 아니라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믿는 아름다운 세상을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단순 무인판매를 너무 오버해 생각하는 거 아니냐'라 비웃어도 좋다.
뜻하지 않게도 '아이스크림 냉동고'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동거리 : 왕복 8.4km
*이동코스 : 백련사주차장 <1.3km> 고려산 정상 <2.9km> 낙조봉



주말 산에 푹 빠져 사는 트레킹 매니아로서 산행 관련 기록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山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전문 월간지(3종:월간 봉제기술/배관기술/플랜트기술)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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