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모나 그 윗 세대가 얼마나 힘들게 전쟁을 치루고, 가난하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지겹다 싶을 만큼 잔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들의 희생과 노고가 이 나라에 이런 여유를 주었으니, 그들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며 아직도 그들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들이 툭하면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면, 나는 높은 사람이 지나간다고 하면 시린 손으로 대청소를 하고 학교 앞 차로변에 코스모스를 심어야 했다. 물론 그때마다 신기하게도 그 높은 분들은 다른 길로 가셨다고 했다.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에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을 외우며 자랐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려운 말들을 외우지 못하면 심지어 매를 맞았다.
무조건 외웠던 그 글에서 나는 '민족의 중흥'이라는 엄청난 사명을 안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다. 그저 부모님이 서로 사랑하고 나를 원해서 태어난줄만 알았던 내가, 그렇게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책임져야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 후 어느 순간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눈 앞에서 수없이 많은 선배들과 친구들이 피흘리고 쓰러지면서, 우리에게 자유와 권리를 가져다 주었다. 우리는 분명히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른이 된 다음에는 무너진 경제를 위해 잠 못자고 휴일에도 일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불과 얼마전까지 이 땅의 국민들은 금반지와 목걸이도 이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렇게 국민은 이 나라를 위해 피와 땀을 바쳤다. 외국에서는 전쟁의 폐허에서 이룬 경제성장이 기적이라고 했고, 짧은 시간에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우리가 기적이라고 했고, 사상 유례없이 나라의 빚을 갚아 치운것도 기적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것이 절대로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기적을 위해 우리 부모와 선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면, 그들은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얼마 살지는 못했지만, 그 동안 책으로 배우고 눈으로 본것만으로도, 국민들은 홍익인간부터 시작된 약속을 군사독재와 경제위기까지 이겨내며 충분히 지켰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코스모스를 심게했던 그들이 약속을 지켜야 한다.
나와 친구들이 심었던 코스모스도 분명히 수없이 피고 졌을텐데, 철나면서 지켜봐 온 그분들은 지키는 약속보다 안 지키는 약속이 더 많았다.
어릴 때부터 보았던 그 윤회같은 풍경은 이제 중년에 접어든 나이에도 변함이 없어 보인다.

손바닥 뒤집듯이 말을 바꾸고, 선거가 끝나면 안 지켜도 된다는 듯한 태도에는 정말 신물이 난다.
국민을 상대로 약속을 하고 표를 받아 높은 자리와 큰 권력을 갖게 된 사람일수록, 그 큰 약속에 대해 반드시 책임져야 할 것이다. 우리도 기대하고 바라보다 고개 돌리고 포기하는 모습이 아닌, 약속을 지키라고 독려하고 지킬 때까지 고개를 돌리지 말아야 한다.

지금 다시 그들은 약속을 어기려고 한다.
우리가 고개를 돌리면 그들은 약속을 어기고, 몇 년 후에 또 거짓 약속을 할 것이다.
제 가슴이 느끼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여러분의 마음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머리로 계산하고 이익부터 따지는 문명을 버리고, 가슴으로 생각하고 심장으로 기억하는 새로운 문명을 여러분과 함께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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