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내커

한국인과 음양사상 : 투명한 기질에 대해서

 

우리 한국사람들은 음양사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면 한국인들은 투명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쪽과 저쪽, 음과 양의 두 측면을 함께 말하면 자칫 이중적이라든지 음흉한 사람이라고 낙인찍고 만다. 필자도 예전에 어느 면접 시험을 볼 때에 뼈아픈 경험을 한 바 있다. 그 자리에서 인문학을 전공했다는 어떤 교수가 질문을 던졌다. ‘지원자는 주역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주역을 공부해서 무엇을 얻었단 말이요?’ 당신이 전공했다는 학문의 결과가 한마디로 무엇이냐는 당돌하고도 공격적인 질문이었다. ‘음양론적 사유방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어요?’ ‘모든 사물에는 음과 양의 상반된 두 측면이 존재하며, 이 두 측면의 관계를 함께 고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한마디로 일축해버렸다. “보수주의자구만!”

음과 양의 두가지 측면과 양자의 관계를 고려하는 태도는 고리타분한 보수주의이며, 이중적이고 음흉한 사상이라는 논리일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을 전후좌우 살펴볼 것 없이 육탄 돌파해야 훌륭한 진보주의자라는 것인가? 이것이 한국의 知性인가? 그것은 파시즘이나 제국주의의 논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고, 지성이 아니라 폭력에 가까웠다. 이 해프닝을 통해서 아무리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할 지라도 한국적 사유방식으로는 음양론적 사상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이제 다음의 글은 한살림 운동을 하는 연구소에서 나온 책자에 실린 내용이다. 음양론적 사유방식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아서, 일부를 전재해보았다.

역설
우리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음양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자연적 성질을 음양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구분했습니다. 세상은 이 두가지 성질인 음양의 생성과 투쟁, 그리고 둘사이의 조화에 의해 움직여간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음양은 한편에서는 대립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상호보완적입니다.

중국을 통일한 마오쩌둥은 이런 동양적 세계 이해를 바탕으로 맑시즘과 변증법을 변용한 모순론을 썼습니다. 두 극 사이의 대립과 투쟁, 그리고 이의 통일로 역사를 이해하고, 이를 역사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조화가 아니라 대립과 투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달리 조화만을 강조하는 논리는 체제를 온존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대립과 조화는 어느 한쪽만을 강조할 수 없습니다. 대립이 있어야 창조가 가능하고 조화가 있어야 평화롭습니다. 창조가 없는 평화는 거짓일 가능성이 크고, 평화가 없는 창조는 극단적 악의 모습, 狂氣일 가능성이 짙습니다.

생명의 세계는 대립하면서 동시에 상호보완적이라는 역설의 논리로만 파악이 가능합니다. 대립과 조화의 경계선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몸의 안과 밖이 그렇습니다. 어디까지가 안이고 어디까지가 밖이며, 어디까지가 물질이고 어디까지가 생명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물질과 생명은 자기 완결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기 완결적인 고립의 모습을 갖고 있기에 그 밖의 세계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드러난 질서 뒤의 숨겨진 질서 속에서 물질과 생명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세계와 교섭합니다. 관계하고 있는 것이죠. 밖의 세계(환경)없이 고립된 물질이나 생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드러난 질서와 숨겨진 질서의 관계 또한 역설인 셈이지요.

얼마전 송두율 교수가 법정 최후 진술문에서 남과 북의 相生은 내 안에 他者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가능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바로 이 생각속에 (생명의) 통일 철학이 있습니다. 대립하는 남과 북 사이에도 늘 상보성이 있었습니다. 한쪽에서 매파가 득세하면 다른 쪽에서도 매파가 부상했고, 한쪽이 비둘기파가 권력을 잡으면 다른 쪽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양자는 대립하면서도 서로 連動합니다. 그래서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립과 배제의 논리, 나와 타자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논리가 극단에 이르면 세계를 선과 악, 천사와 악마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서구의 합리주의가 극에 이르면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나는 100% 옳고 저 놈은 100% 그르다는 것이지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전쟁을 일으킨 부시가 내세운 논리가 그랬습니다. 미국의 절대선이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나라들은 악의 축이라는 사고방식 말입니다. 하지만 생명 세계에서 51%, 49%의 선악은 있을 수 있지만, 100%의 선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순을 모순대로 인정해야 통일이 가능합니다. 아니, 평화로운 공존, 평화로운 창조적 상생이 가능합니다. 이 역설의 논리는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서구적 논리, 합리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모든 사건과 사실들을 역설적으로, 이중적으로 파악하는 논리 훈련이 앞으로 생명문화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가 될 것입니다. 남과 북, 지방과 중앙, 지역과 세계, 공동체와 시장, 정착과 유목 사이의 역설적 관계 설정 등이 앞으로 중요한 과제로 떠오를 것입니다. (모심과살림연구소 편, 󰡔살림의 말들󰡕, 2004. 31-33쪽 전재.)

현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철학박사 , 주역과 도교철학을 중심으로 중국철학을 전공했으며, 중국문화 사상사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저서로는『주역 왕필주』, 『왕필의 老子注』, 『術數와 수학사이의 중국문화』, 『언어의 금기로 읽는 중국문화』등이 있다. 2011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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