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기차바위를 내려오니 여러 갈래 길이 보인다. 세검정에 물 흐르는 홍제천길, 석파정 별당이 보이는 홍지문길 어느 길로 갈까 잠시 고민한다. 성곽길 따라 걸으니 어느덧 창의문이 보인다. 누각과 성벽 사이 감나무에 꽃이 떨어져 열매가 열렸다. 성벽을 보니 담쟁이 넝쿨이 하늘에 닿는다. 뽕나무에 달린 열매도 색깔이 바뀐다. 빨강에서 검정으로 오디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성문과 성벽 사이에 계절이 바뀐다. 한여름으로 가는 길목이다.

  성곽길 따라 발길을 옮긴다. 한양도성 옛길에는 절기를 알리는 꽃들이 천지다. 비 개인 성곽길은 언제 걸어도 상쾌하다. 소나기 지나간 파란 하늘엔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인왕산 성곽에서 손을 뻗으면 목멱산 N타워가 잡힐 듯 코앞에 있다. 서울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도성안과 밖에 붉은색, 연분홍색, 하얀색 꽃이 홑겹으로 피었다. 겨울을 견디어 핀 꽃이다. 성 안과 성 밖 고향집에도 탐스럽고 향기롭게 피었다. 꽃 모양과 열매의 둥근 모양이 접시를 닮아 접시꽃이다.

 

  접시꽃은 누구에게나 친근하다. 역사가 깊은 꽃이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피는 전통 꽃이다. 마을 어귀,길가와 담장 안과 밖에 아름답게 피어 여름을 알린다. 고향집 돌담길에도 벌과 나비가 즐겨 찾는 꽃이다.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이전에 고운 최치원이 ‘촉규화(蜀葵花)’를 노래한 시구가 전해온다. ‘거친 밭 언덕 쓸쓸한 곳에, 흐드러지게 핀 꽃송이 약한 가지를 누르네. 매화비 개니 향기 날리고 보리 바람에 그림자 흔들린다.’ 고운 최치원은 육두품의 서러움을 활짝 핀 접시꽃에 담아 노래했다.

  접시꽃은 키가 크다. 추운 겨울을 보내고 여름 땡볕 속에 아름답게 꽃이 핀다. 여름 소나기를 맞고, 밤이슬을 품으며 탐스러운 꽃이 된다. 촉규화는 뿌리 가까운 아래에서부터 2m 높이까지 차례차례 피고 진다. 600여 년 전 도성 안 힘든 세상살이에도 어김없이 꽃을 피웠다. 1,000여 년 전 비 바람 맞으며 촉규화를 시속에 담았다.

 



  올 여름에도 접시꽃은 비 그친 후 향기를 멀리 전한다. 비바람 맞고 꽃 피듯, 땡볕 햇살에 열매를 맺는다. 한결같은 꽃 고향 같은 접시꽃을 보며, 길속에 삶의 지혜를 만난다. 그리고 더러는 고달픈 인생길에 평생 같이 갈 접시꽃 같은 친구를 하나 만들어보자. 길이 사람을 만든다. 바로 길동무다. 

<최철호/ 남예종예술실용전문학교 초빙교수,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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