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부부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은 점심 식사를 하고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다. 식사 후 자리를 옮겨 커피숍에서 희한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누군가 그간 소식을 묻거나 대답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돌아가며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곧 여기저기 두세 명씩 따로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만히 옆에 앉아 있다가 이쪽저쪽 어느 쪽을 보고 들어야할지 눈치 볼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왼쪽으로 한 번 돌아보고 “그렇군요!” 오른쪽도 한번 돌아보고 “그것도 맞네요!”식으로 앉아 있었다. 게다가 커피숍 음악소리는 너무 크고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 대화 소리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전쟁 통(?)이었다. 이런 소음 속에서 상대방 이야기를 듣는 것도 힘든데 대답할 땐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소리쳐야 했다. 이러다보니 시간이 지나갈수록 피로감이 몰려왔고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생각이 들었다.

 각자 사정은 다르지만 한번 모임에 참석하려면 어렵게 시간을 내야 한다. 더구나 주말 모임은 가족에게 양해를 구해야 해서 아주 소중하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밤새 책을 읽고 글도 미리 써두었다. 다음 일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모임이 밥만 먹고 헤어지는 것보다 무언가 공통 주제를 가지고 생각을 나누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어쩌면 과한(?) 욕심일 수도 있다.

  이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따로 있다.  누군가 말을 하면 전혀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상대방이 말을 하는 중인데 자신이 아는 단어 하나만 나와도 끼어들어 자기 말로 만들어 계속 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말을 물고기 낚시하듯 순간적으로 낚아채 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모임에서 말을 시작해서 끝까지 무사히(?) 마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끝까지 말을 들어주는 사람도 찾아보기가 그만큼 어렵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한국말 순서는 주어, 목적어, 동사 순이다. 이에 비해 영어는 주어, 동사, 목적어 순이다. 예를 들면 영어는 “나는 간다. 학교에”라면 한국말은 “나는 학교에 간다.”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을 끝까지 듣지 않으면 “나는 학교에 <간다>가 <산다>”가 될 수도 있어 예상 못한 말이 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모임을 마치고 헤어질 때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이다. “뭐라고 했어요?” “언제 모인다고?” “어디서요?”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 듣지 않고 있다가 다시 되묻는 것이다.

 ‘이청득심(以聽得心)’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라는 의미다. “들어야 마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들을 청(聽)’이라는 한자다. 큰 귀를 의미하는 왕(王)의 귀(耳), 열(十) 개의 눈(目)과 하나(一)의 마음(心)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청’이라는 글자는 마음으로 보고 듣는 것이며 집중해서 들어야하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다.

 지인 중에 사람들이 유독 피하는 한 여성이 있다. 이유를 물어보니 대부분 고개만 흔들 뿐 말하기를 꺼렸다.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굳이 나서서 말하기를 피하는 것 같았다. 하루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누가 들어도 그 여성 이야기였다. “아니 그 사람은 왜 생각 없이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몇 년이 지나 그 여성과 함께 1년간 공부를 하게 되었다. 필자가 지원한 모임에 그 여성도 지원한 것이다. 명단이 공개되자 사람들이 찾아와서 “갑자기 몸이 아파서 공부 못한다고 해!”라고 말렸다. 말린다고 안 할 수도 없거니와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문은 약간의 사실에 과장된 염려(?)가 덧붙여진 것이었다.

“사람들이 저를 싫어해요!”

“저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참지를 못해요.”

“누가 저를 싫어하는지 저도 다 알아요!”

 1년 간 이 여성이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이다. 이 말을 들을 때면 뭐랄까.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 충분히 이 여성의 말을 들어만 주었어도 그녀가 보내는 ‘I-Message’를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집중해서 들어보면 “저는 이런 사람이니 부족해도 이해 좀 해주세요!”라는 듯 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 여성을 싫어하고 피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지나치게 솔직한 것’이 문제였다. 한마디로 불편한 것이다. 예부터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기 때문에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숨기는 데 더 익숙하다. 감정을 억압하는데 길들여져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는 사람은 일단 경계부터 하고 본다. 그리고 경계하는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그래야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겪어보니 그 여성은 지나치게 솔직해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는 있지만 충분히 좋은 사람이었다. 또 겪어보지 않은 채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런 푸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필자는 1년간 이 여성의 말을 집중해서 들어주기로 마음먹고 하는 말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돼요!”라고 반복했다. 실제로 귀를 기울이니 이해가 안 되는 말이 없었다. 이후 모임이 끝났다. 그런데 누군가 ‘번개 팅’ 공지만 해도 “좋아요. 참석합니다!”라고 맨 먼저 댓글을 달고 있다. 또, 모임에서 차분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주길 정말 잘한 최근 사례다.

‘말의 품격’ 저자 이기주 씨의 글이다.

“삶의 지혜는 종종 듣는 데서 비롯되고, 삶의 후회는 대개 말하는데서 비롯된다.”

 누군가 말을 하는데 가슴을 찌르는 단어에 발끈한 적은 없었는지. 모임에서 많은 말들이 오갔는데 남는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는 없는지. 누군가의 목소리 톤이 거슬려 들어주지 않은 적은 없는지. 정말로 그 사람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도 모른 채 한 적은 없는지. 듣고 싶은 말에만 집중하고 상관없는 말은 흘려버리지 않았는지. 이미 답을 정해놓고 질문을 던진 적은 없는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마음 속 깊은 소리를 들어보면 어떨까!

 여기저기 말 많은 세상. 어쩌면 지금이 ‘듣는 지혜’가 가장 필요한 때인지 모르겠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람이 답이고 듣는 것이 <사람을 얻는 최고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품격>도  말을 많이 하는 것 보다 잘 들어주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필자가 강의 중에 하는 <세 가지 ‘열기’>로 이 글을 맺고 싶다.  여기서 세 가지는 커튼, 창문, 마음이다.

“커튼을 열면 햇빛이 들어오고,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온다. 그리고 마음을 열면 사람이 들어온다!”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면 마음의 소리가 들려 온다.

Ⓒ이지수20190220(jslee30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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