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윤동주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가 1941년 5월 31일 쓴 시다. 이 시기는 그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4학년 봄, 기숙사에서 나와 인왕산 아래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할 때다. 일본의 혹독한 식량 정책 때문에 기숙사 급식이 갈수록 나빠지자 그는 후배 정병욱과 함께 하숙집을 찾아 나섰다. 신촌에서 두 달, 누상동 마루터기 하숙집에서 한 달을 보낸 그는 이곳  9번지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 자리를 잡고 그해 가을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머물렀다.

“그해(1941년) 5월 그믐께,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길에서 우연히, 전신주에 붙어 있는 하숙집 광고 쪽지를 보았다. 그것을 보고 찾아간 집은 문패에 ‘김송(金松)’이라고 적혀 있었다. 설마 하고 문을 두드려보았더니 과연 나타난 주인은 바로 소설가 김송, 그분이었다.”(정병욱,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 《나라사랑》 23집, 외솔회, 136~137쪽)

김송은 함경도 출신의 항일작가였다. 일본 유학 시절 감옥체험을 다룬 작품을 연극 무대에 올리려다  일본 경찰에 ‘요시찰 인물’로 찍혔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저녁을 먹고 김송과 대청마루에서 문학과 세상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고등계 형사가 거의 저녁마다 찾아와 집안을 뒤지고, 윤동주의 책 제목들을 적어 가고, 고리짝까지 뒤지며 편지를 빼앗아가는 바람에 하숙집을 옮겨야 했다.

이 시기에 쓴 작품이 ‘십자가’와 ‘새벽이 올 때까지’ ‘눈 감고 간다’ ‘또 태초의 아침’ ‘돌아와 보는 밤’ ‘바람이 불어’ 등이다. 여름방학 때 고향에 다녀온 뒤 쓴 ‘또 다른 고향’ ‘길’을 비롯해 11월에 쓴 ‘별 헤는 밤’ ‘서시’의 시상을 가다듬은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고 보니, 누상동은 윤동주 시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문학의 발아(發芽) 장소이기도 하다.

예수가 최후로 기도를 올린 게세마니 동산처럼 이곳 인왕산의 한 기슭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며 그가 결연히 '십자가'를 쓰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은 본래의 집이 헐리고 2층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있다. 건물 벽 빨간 벽돌에 붙은 '윤동주 하숙집' 안내판이 길손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윤동주 서거 74주기 추모 음악회 ‘별 헤는 밤 그리고 동주필사’가 2월 15일(금) 저녁 7시 30분 대학로 카페 인생은아름다와라(혜화역 3번 출구)에서 열린다. 이날 ‘이등병의 편지’ ‘가을 우체국 앞에서’의 원작자이자 ‘윤동주의 노래’ 음반을 낸 싱어송라이터 김현성,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필사시집 《동주필사》를 펴낸 시인 고두현이 출연한다. 시노래극 ‘별을 스치는 바람’에 출연 중인 레밴드도 함께한다. 식전 무대는 팝페라 그룹 ‘쏭펙트럼’이 연다.

 

▶윤동주 시노래극 ‘별을 스치는 바람’ 공연은 2월 27일 오후 7시30분 군포문화예술회관 철쭉홀, 3월 2일 오후 5시 구리아트홀 코스모스대극장에서도 열린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