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6시 정각, 류보백화점 쪽에서 밝은 색 셔츠에 착 달라붙는 검은 바지를 입은 그 연구원이 성큼 성큼 걸어왔다.

고쿠사이 거리 입구엔 토요일이어서 관광객들이 번잡하게 몰려다니는데, 그녀는 그 사이를 뚫고 당당하게 다가오더니 가볍게 목 인사를 했다. 나는 그녀보다 좀 더 허리를 굽혔다. 아까와 같은 의심스런 표정은 없어졌지만 연구원다운 도도한 태도는 여전해, 내게 어디로 가는지 전혀 얘기도 하지 않고 앞장섰다.

그녀는 고쿠사이도리에서 오른쪽 골목길로 벗어났다. 걸음걸이 속도가 무척 빨라서 말 걸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식당 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름을 알아두는 게 편할 것 같아 바짝 따라붙었다.

“저어...연구원님, 실례이지만 이름을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저요? 저는 아라카키 에리(新垣恵理)라고 합니다. 그냥 ‘에리’라고 불러주세요”

그녀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사람을 쳐다보지 않고 얘기하는 게 몸에 배인 버릇인 듯. 바삐 따라가면서 나도 독일중소기업연구소(DIM)에 근무하는 ‘연구원’이라고 얘기하면서 명함을 내밀었는데, 명함을 들여다보면서도 걸음속도는 늦추지 않았다.

“...아, 연구소 주소가 뒤셀도르프이시네요...거기...일본사람들 많이 살죠?, 종자보존 시스템을 구매하러 가본 적이 있어요. 구시가에 독일식 족발 잘하는 집 있던데...그 집 이름이 뭐더라?”

“줌 쉬프헨 말씀하시는 거군요”

“네, 맞아요. 줌 쉬프헨...그집 맥주 참 맛있었는데...나하에도 족발집이 있긴 하지만 그렇게 큰 곳은 없어요. 오늘은 단골들만 찾는 아주 작은 식당으로 가겠습니다.”

허겁지겁 그녀를 따라 들어간 식당은 조그마하고 한적한 곳으로 허름한 탁자가 서너 개 놓여있고, 붓글씨로 쓴 메뉴만 잔뜩 붙어있을 뿐, 꾸밈과 장식이 전혀 없었다. 테이블과 의자는 쓰다버린 목재들을 모아 손으로 만든 것이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잠시 후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흰 머리카락에 귀티 나는 주인아주머니가 나와서 눈인사를 하고선 주문도 받지 않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주문을 받지 않는 것으로 봐 연구원과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다 이미 전화로 먹을 걸 주문해놓은 모양.

잠시 뒤 주인아주머니는 300㏄ 짜리 생맥주와 안주를 가져다 놓더니, 말없이 또 주방으로 되돌아갔다. 안주는 작은 생선을 올려놓은 두부.

“에리씨, 두부 위의 놓여있는 이 작은 물고기는 이름이 뭐죠?”

“이거요?...‘아이고’라고 합니다...”

나는 먼저 젓가락으로 ‘아이고’ 한 마리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작은 멸치 크기지만 생선의 형태를 다 갖춘 이 물고기는 떨떠름하고 짜르르한 맛이 혀를 심하게 자극했다. 연구원도 아이고 한 마리를 입에 넣더니 생맥주잔을 들고 내밀었다. 잔을 들어 부딪친 뒤 나는 아무 말 없이 300㏄ 생맥주잔을 단숨에 비웠다. 연구원도 나와 비슷한 속도로 생맥주잔을 다 비우더니 잔을 소리 나게 탁자위에 놓았다.

“선생님은 이하후유를 좋아하시나 봐요?”

“아, 네... 에리씨도 그 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 것 같던데요?”

“오키나와에선 소학교 때부터 이하후유에 대해 귀찮을 정도로 가르칩니다. 그래서 꼭 한번 폭서산방 자리를 한번 가본다면서 지나치기만 했는데, 오늘은 확실하게 찾아가봤네요...그런데, 외삼촌은 이하후유와 서로 잘 아는 사이였습니까?”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분이 같은 대학을 다녔고, 이하후유가 선배였는데 서로 얘기를 나눈 적은 있답니다.”

“그러니까 외삼촌도 도쿄제대를 다니신 거군요...그런데, 선생님, 외삼촌의 노트는 언제 보여주실 거예요?”

“네? 아, 죄송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급습하는 연구원의 말투에 놀라 내 옆 의자에 놓여있는 외삼촌의 ‘식물노트’을 얼른 집어 드밀었다. 근데 노트를 받아들고 몇 장을 넘기자마자 그녀의 정신은 모래땅에 물 스며들 듯 외삼촌의 ‘식물노트’ 속으로 빠져들었다. 주인아주머니가 드디어 본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키나와 해조류들이 먼저 나왔다. 해조류 가운데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건 바다포도와 모즈쿠. 연구원이 노트에 몰입하고 있는 동안 나는 바다포도를 이빨로 톡톡 터뜨리며 씹어 먹다가, 끈적끈적해서 아무리 젓가락으로 잘 집어도 반쯤 빠져나가는 모즈쿠와 씨름하며 계속 맥주를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돼지 귀요리인 미미가와 류큐식 돼지삼겹살 조림인 라후테가 나오자 나는 “그래, 오키나와 요리나 실컷 먹자”라며 음식을 즐겼다. 주인아주머니가 구루쿤 카라아게를 내놓자 연구원은 음식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은 채 손을 뻗어 생선튀김을 집어 입에 넣었다.

“...이건 손으로 집어먹어야 제 맛이 나요”

연구원은 노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얘기했다. 나도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자에 놓고 손으로 오키나와에서 흔한 생선인 ‘구루쿤’의 꼬리를 잡고 머리부터 아싹아싹 씹었다. 그녀는 가져온 생맥주잔을 또 단번에 비우고 빈 잔을 “탁”하고 내려놓으면서도 눈은 여전히 노트에서 떼지 않았다.

일본에서 사람을 바로 앞에 앉혀놓고 이렇게 자기세계에 빠져드는 사람은 처음 봤다. 40분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연구원이 물꼬를 텄다.

“아, 이 노트에서 ‘식물은 사회적 생물이다’라는 테마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꽃과 잎끼리 서로 신호를 주고받듯 나무와 나무끼리, 풀과 풀끼리도 서로 신호를 교환한다’...이 분은 식물의 군락을 ‘사회’로 분석했어요...”

외삼촌의 식물노트는 크게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세 번째 장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는 얘기였다. 다섯 개 장은 이렇게 구성되어있다.

첫째  식물은 사람보다 고등생물이다.

둘째  사람은 에너지를 소비하지만, 식물은 에너지를 창조한다.

셋째  식물은 사회적 생물이다.

넷째  식물은 사람 없이 잘 살 수 있지만, 사람은 식물 없이 살 수 없다.

다섯째   빛이 있으면 콩이 되고, 빛이 없으면 콩나물이 된다.

[빛에 따라 옷을 달리 입을 순 있지만, 콩처럼 변신할 순 없다]

“근데, 선생님은 외삼촌의 과거에 대해 왜 그렇게 관심이 많죠?”

“아, 네...사실 외삼촌은 저의 아버지나 마찬가집니다. 왜냐하면 외삼촌이 돌아가신 뒤 저는 외할머니 댁에 들어가서 외할머니의 손자로 자랐거든요. 덕분에 외삼촌이 받아야 할 유산을 제가 모두 물러 받았고, 독일로 가게 된 것도 할머니의 독촉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할머니로부터 받은 부담을 덜고 싶어서 이렇게 외삼촌의 행적을 찾아다니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그런데도 아직까지 외삼촌의 무덤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어디서 돌아가셨는데요?”

“자마미섬에서요...”

“자마미요?....자마미엔 귀갑묘가 그리 많지 않은데 왜 아직 찾지 못했을까?”

“에리씨, 혹시 자마미섬 잘 아세요?”

“그럼요. 그 섬은 식물의 표본실 같은 곳이죠. 오키나와 본도에도 없는 식물들이 많이 자라기 때문에 유전자 채취를 하러 자주 갑니다. 더구나 저는 스쿠버 다이빙을 좋아하니까, 더 자주 가죠.”

“아, 그렇다면 내일 일요일인데 자마미에 함께 가실 수 없어요?”

“외삼촌의 묘지를 찾으려구요?”

“예, 저는 자마미를 세 번 가봤는데, 마을 사람들에게 외삼촌과 관해 수소문을 해봤지만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제가 지금까지 외삼촌의 행적을 찾아낸 건 거의 미군의 자료에 의한 겁니다. 더욱이 자마미에서 외삼촌을 기억할 만큼 나이 든 분들은 제가 ‘자마미 집단자결사건’을 들추려고 온 사람으로 보고 대답하길 꺼려했습니다.”

“집단자결사건이 이슈가 될 때마다 자마미 주민들이 갖가지 갈등에 부딪쳤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죠.”

“외삼촌이 돌아가신 날짜를 보면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자마미에서 거의 끝난 뒤인데도 총상을 입고 돌아가셨다니...진짜 사망 이유도 궁금합니다.”

“선생님, 자마미촌사무소 가기 전에 있는 스쿠버다이빙 점포 보셨죠?...그 집 아저씨가 제 친척입니다. 그 아저씨께 부탁하면 외삼촌을 기억하는 사람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러세요. 고맙습니다. 제 외숙모 이름은 치넨우타(知念ウタ)입니다. 지금 가지고 계신 그 식물노트는 미군이 군사우편을 통해 우리 할머니께 우송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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