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는 식물학자다. 그래서 그는 혼자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가 앞을 가로막을 때마다 식물의 초능력에 매달렸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오키나와 나하에 처음 도착해 진흙탕에서 땀 쏟으며 대포를 옮기는 작업에 동원되어 그 깊은 우울증에 걸려 벗어날 길이 없었을 때, 우친(우콘)뿌리 하나가 그를 단숨에 늪에서 올라오게 해주었다.

또 우타와 성악기슭에서 혼인식을 올릴 때 하객을 한 사람도 초청할 수 없게 되자 수많은 들꽃들을 하객으로 모셨다. 다음날 전쟁터로 다시 떠나야 할 때 두 사람은 ‘가쥬마루’ 두 그루를 징표로 심고 가쥬마루로부터 초지혜를 얻었다.

가지가 공중에 뿌리를 내려 그 뿌리가 공기 중의 습기를 흡입하고, 이 가지에서 난 뿌리는 바람에 흔들려도 말라 죽지 않고, 땅에 닿으면 그곳에서 땅속으로 뿌리를 내려 나무 기둥을 만들고, 옆에 있는 가지를 만나면 한 몸이 되어 서로 영양을 주고받는 ‘초능력 식물’인 가쥬마루의 지혜를 배운 덕분에 이수와 우타는 갖은 곤욕 속에서도 아직 살아남은 것이다.

스템 대위는 C-10을 함께 확인하고 돌아온 뒤 이수에게 내일 아침까지 제10군 정보기관(CACI 10th Army) 본부에 보고할 문서를 작성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자네가 이 문서만 확실하고 적합하게 작성해주면 내일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식물학자가 될 수 있게 해주겠어!”라며 눈에 힘을 주었다.

스템은 C-10에 저장된 다이아몬드에 완전히 영혼을 빼앗긴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이수는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그가 ‘다이아몬드’에 홀려있다면, 이수는 ‘식물’에 고스란히 홀려있으니까.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자유롭게 식물조사를 할 수 있는 혜택을 주겠다는데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대위님, 제가 내일 아침까지 완벽한 보고서를 만들겠습니다. 다만 지금 1시간만 외출하고 돌아와서 작성하겠습니다.”

“어디로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미스터 서, 난 자네를 믿으니까...”

스템이 이수를 노려보는 눈초리로 볼 때 그는 당장 이수를 원심분리기에 집어넣어 ‘다이아몬드’와 관련된 정보를 간단하게 분리 추출해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런 급박한 여건에서 이수는 혼자서 하룻밤 사이에 역사에 남을 중요한 문서를 세밀하게 작성해내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이수는 이 난국을 빠져나가기 위해 이번에도 ‘식물의 초능력’에 매달리기로 했다. 1시간 외출을 하겠다는 게 바로 그 이유였다.

이수는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 ‘이 지구에서 사람이 없어도 식물은 잘 살아나갈 수 있지만, 사람은 식물 없인 결코 생존할 수 없다’라고. 오늘 이수는 이 진리를 다른 때보다 더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이수는 수용소에서 나와 우타의 집으로 갔다. 그녀의 집에 숨겨둔 코카 잎을 찾아 좀 음용하기 위해서였다. 우타는 아직 퇴근하지 않은 시간. 이수는 지하실로 내려가 전에 보석동굴 C-10에서 가져온 코카 잎 뭉치를 찾아내 작은 절구에 빻아 하얘질 때까지 갈았다. 많이 음용하면 중독될 수 있으니까 적정량을 흡입했다.

이치카와 중대장의 얘기에 따르면 일본군은 오키나와 나고에 ‘다케다 약초원’이란 농장에서 대규모의 코카를 재배했다고 한다. 이 농장은 류큐 주민들과 한반도에서 강제 징용해온 군부들을 동원시켜 코카나무를 재배해 잎을 딴 후, 코카인으로 만들어 일본군 가미카제 대원과 전투병들에게 나눠주었다는 것.

오키나와에 주둔한 일본전투병들이 바로 눈앞에 적이 나타나도 두려움 없이 공격을 했는데 이게 다 코카인의 힘이었다고. 이수는 오늘 미군을 사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군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코카인을 활용했다.

‘코카인’이란 많이 먹으면 마약이 되지만 꼭 필요한 사람에겐 식물이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정말 심신이 피곤해 두뇌활동을 할 수 없을 때 코카나무가 사람의 삶을 도와준다. 처음 사람의 지적능력(IQ)을 테스트한 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가 식물학을 이해했다면 인간의 지능을 순간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것이다.

코카인은 일시적으로 기억조성능력을 높여주고, 기하학적 공간지각을 잘 인지할 수 있게 하며, 논리적으로 분류하는 능력도 올려준다. 고백하자면 이수가 도쿄제국대학 입학시험을 치러갔을 때 아침에 아버지가 진한 커피를 가지고 와서 마시게 했다. 약재상을 하는 아버지는 나중에 그 커피에 코카인이 소량 들어있었다고 털어놓았다.

IQ를 높여주는 식물은 코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나팔꽃의 일종인 하와이언 베이비우드로즈를 비롯, 말레이시아 원산인 크라톰, 멕시코 원산인 살비아디비노럼, 아라비아반도 원산으로 코카인처럼 잎을 씹어 먹는 카트, 그리고 농도가 진한 아라비카 커피도 지적 능력을 향상시켜주기도 한다.

[코카나무.....사진=위키피디아]

벽열전등 영사기 축음기 등을 발명한 토머스 에디슨도 코카인을 즐겼으며, 에밀 졸라가 그렇게 유창한 언어를 구사해낸 것도 코카인을 음용해서라고 한다. 프랑스에선 해시시가 새로운 문학과 예술을 창조하는 도구로 쓰였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하지만 각성작용을 하는 이런 식물은 꼭 필요할 때만 전문의의 처방을 통해 극미량 흡입해야 하는데도 사람들이 적정량을 지키지 않거나 너무 자주 음용하는 바람에 이들은 ‘마약’이 되어가고 있다.

저녁 7시쯤 이수가 정보반으로 돌아와 보니, 이수의 책상 위에 문서작성을 위한 서식과 필기도구가 놓여있고 스템 대위는 자리에 없었다.

이수는 자기 자리에 앉아 기억 조성능력이 향상된 맑은 정신으로 몇 달 전 단 한 번 들어가 본 C-10 동굴의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그려냈다. 중간 통로의 넓이를 비롯, 나무상자 속에 코카인 잎 등 나뭇잎과 밀 쌀 등 곡류 사이에 감춰진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가넷, 오팔, 에메랄드, 진주 등 이수의 손끝을 스친 여러 가지 보석의 종류까지 모두 기억해내 치밀하게 기록했다.

문자와 숫자로 구성된 서류뿐 아니라 식물도감을 그리듯 동굴의 생김새와 정교한 보석상자 배치도도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려놓았다. 또 다이아몬드 등 보석과 진귀품을 일본군이 싱가포르 등에서 어떻게 강탈했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C-10까지 도착했는지도 참고자료로 첨부했다.

작업을 마치고 세수를 하기 위해 세면장으로 가는데 벌써 도카시키섬의 능선으로 아침 해가 이마를 삐죽 내밀었다. 세수를 마친 뒤 이수는 숙소로 가지 않고, 스템 대위가 출근하길 기다렸다.

발소리를 크게 내며 무표정하게 정보반으로 들어선 스템 대위는 아침 인사도 받지 않고 이수가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문서를 집어 들었다. 문서를 읽어 내려가던 스템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미스터 서, 자네가 천재란 건 일찍부터 알았지만.....”이라더니 한참 동안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서류를 처음부터 다시 한번 훑어본 그는 밝은 표정으로 이수를 쳐다보았다.
“미스터 서, 자네에게 오늘부터 사흘간 특별휴가를 주겠네. 별도 외출증을 끊어줄 테니까 이 자마미섬에서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즐기게!... 아, 자네 부인인 치넨씨에게도 특별휴가를 주도록 조치하겠네.”

스템이 이수에게 3일간 휴가를 주겠다고 하는 건 C-10을 찾아낸 공과를 자기만 독식하겠다는 의도가 깃들어있어 보였지만 이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아, 이런 자유를 얻은 게 대체 얼마만인가. 지난해 나하에서 이치카와 중대장으로부터 24시간 휴가를 받은 적이 있지만, 3일이라는 자유시간을 얻은 건 조국에서 징용으로 소집당해온 이후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이수는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방학 맞은 중학생처럼 하늘로 오른손을 치켜들고 “아자!” 소리치며 한바탕 뛰어오른 뒤 숙소로 향해 달려갔다. 식물조사 노트를 챙겨 곧장 우타의 집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수가 숙소 앞에 다다르자 아침 나팔꽃처럼 이슬 젖은 웃음을 띤 두 여자가 숙소 앞에 딱 버티고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우타이고, 다른 사람은 토미요였다. 얼른 달려가 우타를 껴안고 싶었지만 토미요가 옆에 서 있는 게 신경 쓰였다. 결코 함께 있어서는 안 될 두 사람이 함께 웃으며 서있는 걸 보니 방금 전 스템으로부터 받은 ‘자유’에 생채기가 났다.

“이수씨, 어떻게 된 거예요? 어제 집에 들렸다면서 나를 보지도 않고 횅하니 가버리시다니?”

“응, 응급한 일이 생겨서... 근데 어떻게 토미요씨와 함께...?”

“아, 오다가 저 앞길에서 만났어요. 토미요씨도 이수씨를 만나러 간다고 해서...”

진하게 화장을 한 토미요는 여전히 매혹적인 몸가짐으로 이수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이더니 천천히 얼굴을 들고 이수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수씨, 저 내일 하와이로 떠나요. 그동안 너무 고마웠습니다.”

“우메자와 전대장도 같이 갑니까?”

“아뇨, 저 혼자 갑니다. 전대장님은 전쟁이 끝나면 도쿄로 돌아가겠대요.”

5월말에 들어서면서 자마미 수용소는 인원이 꽉 차 더 이상 주민과 포로를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군은 주민들을 당분간 하와이로 이송한 뒤 전쟁이 끝나면 오키나와로 복귀시키는 전략을 짰다. 이수와 함께 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 군부들도 190명이 하와이로 가겠다고 지원해 내일 수송선을 타게 된다.

“우타, 당신 오늘부터 3일간 특별휴가를 받을 거야...지금 의무반에 가면 휴가명령이 내려와 있을 거야.”

“어떻게 된 일이죠?”

“응? 집에 가서 설명할게...”

이때 이수의 등 뒤에서 이틀 동안 보지 못했던 서상덕이 나타났다

“아이구, 형님 여기 계셨네예. 저 내일 떠나는데 못 뵙고 갈 뻔 했심더.”

“아, 그래? 그러면 이분과도 인사하지. 토미요씨라고 경남 울주 출신이셔.”

“아이고, 형님도... 토미요씨와는 전부터 잘 아는 사입니더!”

“그래?..... 그럼 두 사람 다 내일 하와이로 떠나니까, 오늘 저녁 우리 집에서 회포를 풀면 어떨까?”

“황송합니다. 형님.”

 

이파 한경닷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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